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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15바트, 기차

 

허술한 몸, 방콕 역에서 아유타야까지 가는 기차, 교통비는 15바트(525원 정도). 주인이 있을 리 만무한 좌석번호가 따로 없는 3등석. 맨발이면 어때, 누군든지 차고 앉으면 그만인 자리. 앉다가 덜컥, 의자가 내려앉자 곧바로 다른 자리로 옮겨 앉으면 되었었다. 활짝 열린 채 닫히지 않는 창문으론 키 큰 나뭇가지 들락거리고, 세게 또는 무지막지하게 들이대는 바람은 그럭저럭 시원했다. 도시는 천천히 시동이 걸리고 창밖은 충분히 푸르렀다. 이국의 하늘은 높고 햇살을 스치며 드문드문 읽히는 글자. 거칠게 밀려드는 마무리 졸음인 듯 고달픈 장삿꾼의 호객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던 내 추억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구슬치기를 하는 맨발의 아이들. 마을 입구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가 울거나말거나 묻어둔 구슬 한 움큼 꺼내들고 씩씩거리며 편짜기가 시작된 까까머리 아이들. 어쨌거나 저 구슬 다 따야 집으로 돌아가려는지 흘리는 땀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담장 그늘 속, 볼 빨간 여자애들은 연거푸 나풀나풀 단발머리 띄우고 고무줄 놀이한다. 구슬 다 잃은 활이는 기어코 고무줄 다 끊어놓고 돌담 돌아 도망갔으니 옥이가 목젖 보이게 우는 건 당연한 일. 1월, 여행 중에 만난 태국의 기차에서 내다본 창밖은 그렇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우리가 그랬다. 비둘기호를 타고 몇 시간 달려 다다른 시골에서 비포장도로를 만나는 건 예사였다. 아주 특별한 날에나 먹어보았던 짜장면 한 그릇의 생색도 대단해 보이던 그 때. 아끼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오직 자식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로 알고 개천에 용 나기를 학수고대하며 몸 부서지는 줄 모르고 돈 벌어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일에 몸 바친 부모님들이 계셨다. 어쩌면 ‘한강의 기적’은 우리들의 숱한 어머니, 아버지들이 여러 남매 낳아 기르며 피땀으로 일궈낸 기적이 아닐까 싶다. 기적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 비둘기호가 가끔은 그리울 때가 있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초를 다투며 달라지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황금연휴를 앞두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천공항의 줄지어선 캐리어부대들. 야간의 홍대 앞에서 마주치는 흥에 겨워 달아오른 젊은이들. 샤*백을 매고 알바를 가는 어린 여대생들 모두 이미 그들만의 정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이 흘러가고 그 속의 세상 또한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오늘 이곳 이국의 기차 안에서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간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자꾸 떠오르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한동안 잊고 지낸 지난날의 추억은 그저 추억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삶의 거름이요 발판이었던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거름이란 생각에 이르러서야 오늘 만난 15바트의 허름한 기차 안에서 만난 풍경을 그대로 안고 돌아가기로 했다. 도로마다 골목마다 변화와 발전을 준비하느라 공사 중인 그들의 뜨끈뜨끈한 열정과 노력 또한 내 안에 한동안 담아두기로 했다. 혹여, 나이를 핑계로 어제와 내일을 잊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늘에만 갇혀 살게 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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