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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동그라미가 있는 풍경

 

입춘이 지나고도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그래도 양지쪽으로 모이는 햇발은 도탑다. 초록빛을 다 잃고 하얗게 마른 풀을 들추면 냉이 잎이 숨어있을 건만 같다. 일 하는 틈틈이 밖으로 눈이 간다. 서울지역 대보름 달 뜨는 시간을 검색해보니 오후 6시 27분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가 조금이라도 빠르지 않을까 싶어 눈에 익은 능선을 바라보지만 아직은 저문 하늘만 가득하다.

바쁘게 살다보니 보름 쇠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열 나흗날 오곡밥도 마트에서 파는 잡곡을 사다 겨우 흉내만 내고 나물도 일하는 사이사이에 서둘러가며 억지로 아홉 가지 구색을 맞추기도 절로 한숨이 나간다.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상을 차리면서 준비한 나물과 오곡밥을 보니 동동 거린 보람이 있다. 거의 매일처럼 빼놓지 않고 막걸리를 사 들고 온 남편에게 한 마디 한다. 기껏 나가서 좋아하는 막걸리만 사고 부럼은 안 사왔느냐고 하니 내일 사다준다며 벌써 의자에 몸을 앉힌다. 피곤한 탓이겠지 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해마다 이제부터는 그냥 편하게 살자 하다가도 이맘때면 벌써 마음이 들썩인다. 이렇게나마 거르지 않고 지나가는 것으로 작은 기쁨이 된다.

정월 대보름은 보름날 당일에 끝나는 명절이 아니라 하루 전날부터 시작되는 이틀에 걸친 축제이다. 하루 전날인 열 나흗날에 오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은 서민들을 위한 음식을 먹으며 곧 다가올 봄을 준비한다. 정초부터 하던 모든 놀이를 끝맺으며 한해 농사를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날이다. 농사일은 자연과 발을 맞추어야 하는 일이고 하늘의 허락이 있어야 내 것이 되는 일이라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렇다 보니 서로 힘을 북돋우며 이웃사촌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보름날엔 이른 새벽 부럼을 깨고 귀밝이술을 마시고 더위를 팔면서도 무병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흰 쌀밥에 고기반찬에 복쌈을 싸먹으면서 풍년을 기원하고 이른 저녁을 지어먹고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동산위에 올라 제일 먼저 달을 본 개구쟁이의 고함 소리를 신호로 달맞이가 시작되었다. 다북쑥으로 어린 아이 나이 수대로 묶은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며 절을 하고 남은 불에 집집마다 가져온 떡을 구워 한 조각씩 떼어 호호 불어 서로 먹여주는 것도 별미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등극했다. 갑질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상대적으로 을질이라는 말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갑질 앞에 온전히 굴복해야 하는 을질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떤 의미가 될지 의문이다. 그러나 잡곡밥에 나물반찬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밥상에는 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냥 아무 힘도 빽도 없는 을들의 향연이다. 서로 경쟁은 하되 시기하지 않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라도 따돌림은 없는 이웃으로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간다. 모자라 끊어지지도 않고 비뚤어져 모나지 않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살아간다. 하늘엔 둥근 보름달이 뜨고 땅위에선 아이들이 만드는 동그라미가 빛난다. 그러고 보니 돼먹지 않은 갑질만 아니라면 을질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다. 보름달은 벌써 하늘 가운데를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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