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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1808년 5월 3일, 학살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눈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은 제목 그대로 1808년 5월 3일,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화폭에 담긴 장면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그림이다. 필자가 근래 혁명기 대륙의 역사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면서 여러 번 이 작품을 마주쳤었지만, 그때마다 장면이 처한 극한 공포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시선을 회피해 버리곤 했다.

가늘고 긴 여러 개의 총부리가 하나의 목숨을 향해 겨냥하고 있다. 표적이 된 남자는 두 손을 번쩍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는 바닥에 놓인 등불과 함께 화면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겁에 질린 포로들 너머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으며, 그의 하얀 셔츠는 암흑의 하늘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질식할 것만 같은 하얀 빛을 띠고 있다.

‘1808년 5월 3일’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상황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증언이기도 하지만, 면밀히 바라보면 판타지적인 요소도 많이 담고 있다. 번쩍 든 사내의 두 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과 비슷한 상흔이 있다. 그는 주변 인물들과 비교했을 때 구도상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어 언뜻 보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또한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의 무리 중 안쪽 인물은 인간의 다리가 아닌 야수의 다리를 하고 있다. 먼발치로 보이는 교회는 음산한 기운을 품은 영적인 존재처럼도 보인다.

무기를 든 군인들은 프랑스의 군인들이며, 1808년 현재 스페인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의 권력을 장악한지 몇 년 뒤다. 처음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유럽의 일부 지식인 계층은 자유주의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고 프랑스로부터 헌법이 건너오기를 바랐으며, 이는 스페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야 역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했던 예술가였으며 프랑스와 정치적 협력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비평가들의 견해도 있다. 그 견해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막상 자신의 조국에서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던 프랑스 군대의 만행을 보고 그는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1808년은 고야가 극심한 병을 앓아 청력을 상실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어려움, 신체적·정신적 질병은 그를 어둡고 강렬한 회화의 길로 이끌었다. 격변기, 피와 전쟁으로 얼룩진 시기였으니 공포의 회화야말로 가장 적합한 회화였으며 그렇지 않은 회화는 시대를 기만하는 회화였으리라. 자크 루이 다비드와 활동 연대를 같이 했던 그는 당시 급변하는 미술사조들을 두루 거쳤는데, 작품 활동 초기에는 로코코 회화풍을 지니고 있었다가 곧 신고전주의를 받아들였고, 완숙기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기괴하고 어두운 색채와 형태를 드러낸다. 당대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던 작품들을 보고 후대인들은 그에게서 사실주의의 특성 역시 발견하곤 하지만, 꿈이나 문학작품을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함으로 인해 그는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고야는 미묘하고 혼선적인 행적과 드라마틱한 일대기 때문에도 후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로 인해 전기도 여러 권 쓰였다.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권력자들을 기괴하게 묘사한 에칭 역시 많이 남겼고, 그러한 작품 중에는 당시 출판되지 못했던 것들이 많다. 권력이 교체될 때마다 정치적 입장을 수정해가며 궁정화가로서의 자리를 지켰으며, 민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 같았지만 막상 정치적 변화로 인해 신변적 위기가 찾아왔을 때 손쉽게 프랑스로 망명을 갈 수 있었다.

‘1808년 5월 3일’은 그가 취했던 노선들 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례이다. 그는 정말로 이 작품에서 동족의 아픔을 그리고자 했던 것일까. 총부리의 표적이 된 흰 셔츠의 사내는 절대로 성스러운 존재나 위대한 순교자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고야는 어쩜 이 사내에게도, 프랑스 군인에게도, 포로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분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골방만이 예술가의 진정한 본향이 되곤 한다. 이 시기 많은 수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극심한 우울과 고독을 예술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이 작품을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신착란과 극심한 우울증이 고야를 찾아왔고,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위치한 ‘귀머거리 집’에서 인간존재의 광적인 실체를 담은 14점의 대형 벽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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