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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현륭원 석물 (하)

 

보통 임금이 죽으면 다음 후계자가 즉위와 동시에 선대왕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차기 임금은 즉위 초기로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해 생각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정조 또한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의 묘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힘을 키웠고 또 비밀리에 명당을 찾았는데 즉위 13년이 지난 후 그 뜻을 실행하게 된다. 권력이 무르익은 시점의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조선 최고의 왕릉으로 만들고자 수원을 통째로 옮기는 엄청난 공력을 들여 사도세자의 묘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현륭원(융릉)에 가보면 다른 왕릉에 비해 그 봉분과 석물의 크기가 현저하게 작아 실망하게 된다.

정조는 현륭원을 처음 계획할 때 사도세자와 큰 관계가 없는 인조 장릉(長陵)을 기준으로 삼는다. 장릉은 처음 파주 운천리에 설치되었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조 7년(1731)에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석물(石物)은 기존의 것을 가져와 재사용하고 여분의 공력으로는 석물을 첨가하여 세조 이후 모든 격식을 갖춘 화려한 왕릉이다. 그래서인지 정조는 현륭원을 장릉을 기준으로 삼아 공사를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검소한 세조 광릉(光陵)을 따르도록 변경 지시하여 현륭원은 장릉과 광릉의 중간수준으로 병풍석과 와첨상석은 있지만, 난간석이 없는 모호한 양식이 된다.

현륭원의 석물이 생각보다 작아진 것은 뜻밖에도 간단한 원인에서 발견된다. 공사가 시작되지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현장에서 혈(穴) 자리가 작다는 이야기를 듣고 흙을 채워 터를 넓힐 수도 있으나 이럴 경우 명당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봉분과 석물의 크기를 작게 하고 석물의 개수도 줄이는 결정을 한다.

당시 정조의 마음은 일성록(1789년 8월 16일)에 잘 나와 있는데 ‘묘역 혈의 앞과 뒤 석물을 설치할 곳이 매우 좁으니 병풍석과 와첨상석(瓦?裳石)은 설치하되 나머지는 광릉의 제도에 따라 혼유석(魂遊石) 1좌(坐), 장명등(長明燈) 1좌, 망주석(望柱石) 1쌍, 문석(文石)·무석(武石) 각 1쌍, 양석(羊石)·마석(馬石)·호석(虎石) 각 1쌍으로 하라’라고 하여 보통 2쌍으로 된 석물을 1쌍으로 하게 된다. 임금을 상징하는 것은 병풍석보다는 오히려 난간석이고, 병풍석과 와첨상석을 만드는 일은 난각석을 만드는 것보다 수십 배의 공력이 드는 일인데 정조는 난간석보다는 병풍석을 선택한다.

병풍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면석(面石)과 인석(引石)의 조각을 들 수 있다. 한반도의 병풍석은 신라왕릉에서 시작되었으며 처음은 면석 앞에 12지신상이 독립적으로 조각상으로 있다가 면석에 부조(浮彫)된다. 그리고 고려를 거쳐 조선의 왕릉에 이어지나 조선시대의 12지신상은 점차 간소화된다. 조선 초기의 건원릉과 선릉 면석에는 구름을 탄 12지신상이 작게 조각되어 있었고 세조 이후 병풍석이 없어지면서 대신 난간석의 기둥 하부에 작게 조각된다. 그리고 이장한 인조 장릉에 병풍석이 다시 생겼으나 12지신상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모란과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현릉원의 병풍석 문양도 이어받게 된다.

현륭원 인석을 인조 장릉과 비교하면 장릉의 인석은 조각 없이 단순한 방형의 돌로 끝 면에 글이 쓰여 있는데 반해, 현륭원의 인석은 끝단이 만개된 연꽃으로 조각되어 있고 이 꽃 위에 또 반 정도 피어있는 연꽃이 있어 이중의 조각으로 매우 화려하게 되어있다.

현륭원 이후 병풍석은 한동안 세워지지 않다가 황제국을 선포한 고종과 순종 능에 나타나며 병풍석의 면석에는 모란을 인석에는 연꽃 등을 조각하여 그 맥을 잇고 있다. 황제릉의 병풍석 조각 중 면석의 모란은 더 화려해지지만, 인석의 끝에 있던 연꽃은 고종 능에 단순화되고 순종 능에서는 사라진다.

현륭원의 병풍석은 세조에 의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가 당해 임금이 가장 힘이 있던 시기에 만들었고 또 난간석까지 포기하면서 만들었기에 여기에 들어간 조각은 매우 뛰어난 것이며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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