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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용주사

 

경북 안동시는 술과 음식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는 많은 반가(班家)에서 제사(祭祀)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은 조상의 숭배에 대한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시대 제사음식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두부(豆腐)로 지금과 달리 고급음식으로 취급되었다. 두부 역사는 고대 한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에서는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아 우유를 구하기 힘들어 콩으로 만든 두유를 대용하였고 거기서 물기를 빼면 두부가 된다. 아마 우리나라에 두부가 들어온 것은 고려 원간섭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찰은 두부의 제조기술이 발달하게 되는데 승려들이 고기를 먹을 수 없기에 단백질 섭취를 두부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에 왕릉의 근처에는 두부를 만드는 곳으로 근처 사찰을 지정하거나, 없으면 새로 사찰을 건축하여 조포사(造泡寺)라 하였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억압을 받던 사찰은 능원원당사찰로 지정되면 왕실로부터 지원과 보호를 받게 되어 지정되는 것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퇴위되고 왕실의 권위와 권력이 약해져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사찰)에 대한 지원이 왕실로부터 끊어지자 원찰들은 그동안 불교 교리와 맞지 않았던 왕릉 제사 등 유교적 옷을 벗어버린다.

조포사인 용주사의 건립은 정조 13년(1789)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후 바로 추진된다.

조포사의 건립할 장소를 정조 14년 2월 10일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한 후 직접 현장에 나가 살핀다. 조윤식은 관련 승려의 말을 빌려 ‘산 정상에 있던 관계로 사찰을 건축한 후 60년 만에 황폐해져 사찰을 새로 지으려면 산 밑 평지의 밭에 남향으로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의 전신 갈양사(葛陽寺)는 현재 용주사의 자리가 아니고 뒷산 정상 부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포사의 공사는 정조가 현장을 방문한 며칠 후인 2월 19일에 시작하여 4월 15일 상량과 종교 활동에 필요한 여러 기물의 설치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각 분야의 최고기술자들이 참여하였고 특히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주관하여 유명하다. 조포사는 7개월여 공사를 거쳐 9월 29일 완성을 하였지만, 낙성식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인 1790년 10월 6일에 하였다.

용주사의 건립에도 공명첩을 발행하지만,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국민모금운동을 펼치고자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을 통해 모금하고 전국에 화주승(化主僧)까지 보내 시주를 독려하였다.

용주사 시주록(施主錄)에 의하면 경기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왕실 관련 기관과 제주 관아까지 시주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시주한 총액은 8만7천505량(兩)이고 지출한 금액은 건축에 5만7천389냥, 논밭 구매에 2만8천116냥, 8도에 시주승의 여비로 2천냥이었다.

용주사 건축비가 5만7천389냥으로 수원향교가 7천599냥이 들어간 거에 비하면 비중이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용주사를 건축하던 시기에 수원부사 조심태가 ‘조포사는 일반적으로 유지하는 재정이 열악하므로 지혜(紙鞋, 종이로 만든 신발)를 만들 수 있는 특전을 주자’라고 건의를 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용주사에 시끄러운 공장(工場)을 설치하는 것보다 많은 농지(여의도 두배 크기)를 사주어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원만한 운영이 되도록 배려를 하였다.

용주사(龍珠寺)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뜻이다. 융릉이 반룡농주(盤龍弄珠,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기에 주변 시설을 여의주로 생각하여 연지(蓮池)와 안산(案山)을 둥글게 만들어 듯이 조포사의 이름을 용주사로 하여 풍수적 완결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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