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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오물오물 가물가물

 

눈을 들면 보이는 모든 것이 초록이다. 이른 봄 죽은 듯 거무칙칙한 나뭇가지에 연둣빛 안개가 어리는가 싶더니 꽃비가 내리고 개나리도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진달래도 지고 철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게 봄은 변화무쌍한 얼굴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선물한다. 봄이면 초록바람이 향기로운 들판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삘기라고 부르는 억새풀의 햇순을 뽑아 먹기도 하고 시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 신 맛이 도는 시경을 잘라먹었다. 좀 더 활발하게 산으로 다니는 아이들은 찔레 순을 꺾어 가방에 가득 담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여기저기 찔리고 긁힌 생채기가 빨갛게 그어진 팔로 나누어 주면서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도 잘 못 싸오던 아이도 그 날은 웃음소리가 커졌다.

비가 오거나 한가한 날에 할머니가 어린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손수 만드신 쑥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문제를 내신다. 봄에 나오는 풀 중에 조금만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게 무언지 아느냐고,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결국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다리면 “그게 바로 쑥이란다.” 하시며 웃으시고 쑥떡을 오물거리던 우리의 입도 동시에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른 풀은 조금 나왔다고 하지만 쑥은 쑥 나왔다고 하니까 손톱만큼 나와도 쑤욱 하고 키가 많이 자란 것 같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쑥떡 맛은 두고두고 봄만 되면 나를 설레게 한다. 아카시아 꽃잎을 씹으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가 달다고 하는데 유난히 나는 날콩 비린내가 난다고 뱉어버리던 날도 이제 눈앞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했다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평생 언제 어디서고 나와 함께 계실 줄 알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잊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생신이 어느 날인지는 알고 며칠 전 부터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작 그 날은 깜빡하고 아버지 생각은 한 톨도 하지 않고 지나고 나서야 아차 하는 자신을 보며 결국 나라고 별 수 있으랴 하는 마음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다. 아버지 산소에 둥글래가 많이 나서 금초 때 뽑아야 한다는 동생의 말에 올해는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 해서라도 따라가서 풀이라도 뽑아드리자 했던 노릇이 동생들을 보내면서 잘 하고 오라고 하면서 시원한 얼음물도 못 챙겨 보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엄마가 쓰시던 반짇고리나 색실이나 물감을 싸 두시던 손수 만드셔서 해 마다 물을 들여 쓰시던 보자기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부엉이와 함박꽃 그리고 복(福)자 수가 놓인 인두판도 프라이팬을 닮았던 다리미도 사라졌다. 명절 때면 제일 먼저 꺼내 금빛이 나도록 닦으시던 제기들도 기름을 발라 반들반들 윤이 나던 다식판도 잃어버렸다. 얼레빗과 참빗을 간직하시던 빗첩도 엄마의 손길을 따라 갈 수 있는 끈이 되어 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은 이제 하나도 챙겨두지 못했다. 물론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가 손수 살림을 정리하셔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여자는 무조건 시집을 잘 섬겨야 한다는 말씀에 무심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뼈아픈 후회로 남는다. 돌이켜 보니 효도라고 이름 지을 일도 가물가물하다. 어버이날 아들들은 전화만 하고 딸은 어떻게 해서라도 다녀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딸도 없는 나는 앞으로도 가물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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