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정병근
한 생각을 버릴 때
한 소식 온다
누가 공중부양의 기적을 행하는지
가르마를 사뿐사뿐 밟고
맨발의 밥이 내린다
집집마다 고봉밥 한 상식 차려지고
두런두런 祭文(제문)읽은 소리
수저 부딪치는 소리
숭늉 마시고 방문을 연다
세상 모든 눈썹 위에 쌓이는 눈
흰 가지를 털고 후드득 떨어지는 눈
반찬 없는 흰밥이
너무 많이 오셨다
세상 모든 길들이 지워졌다. 하늘길이 열리고 있음이다. 뻥 뚫린 하늘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노라면 아무런 연고 없이도 반갑고 고맙고 따듯하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쌓였던 오해가 풀릴 것만 같은 눈 내리는 날. 이렇듯 푸근하게 내리는 눈은 오랫동안 안부가 없던 친구의 소식을 받아보는 눈길이었다가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님의 손길 같아서 눈의 맨살을 벅차게 마중하곤 한다. 시인의 말처럼 한 생각을 버릴 때 한 소식이 오듯이 말이다. 시인은 눈을 보면서 제삿날 제상 앞에 놓인 흰 밥을 생각했으리라. 엄숙하고 풍성한 제상이 차려지고 밖에선 소복소복 고봉밥이 아니 하얀 눈이 하염없이 쌓이고 있다. 다녀가는 혼령 또 한 다정한 인사를 건넬 것만 같은, 두런두런 제문 읽는 소리와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로 방문을 여니 세상 모든 풍경들이 흰밥으로 쌓이고 있다. /정운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