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생활에세이]낭만 파먹기

 

하늘이 조용히 가라앉고 있다. 활활 타오르던 하늘이 글쎄 서서히 붉어지다가 숯가마 숯덩이 식어가듯 차분히 가라앉는 이 시간. 한여름, 저녁을 맞이하는 초저녁의 그 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도심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도, 오늘처럼 파도소리 출렁거리는 저 소리에 섞인 숱한 인파들의 소음에 섞여서도 문득 불그레한 그날 같은 하늘이 눈에 들어올라치면 내 숨은 서정을 풀어놓기 일쑤다. 언제 풀어놓아도 마음 푸근해지는 추억 속 숨겨놓은 나만의 고유한 낭만, 나는 그 그림 속 풍경을 결코 놓아버릴 수가 없다.

탈 탈 탈 탈 경운기 소리 들리고 집 지키던 강아지가 마중 나오는 골목어귀. 뉘 집 할 것 없이 마당 한쪽 한데 솥 걸어놓은 아궁이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감나무 밑 넓은 평상마루에서 홍두깨로 밀어낸 어머니의 칼국수는 쑹쑹 썰려나가고 소죽솥 아궁이 벌건 불길에 뜸들어가는 소죽냄새가 구수하다. 막내 상한이 차지가 된 칼국수 꽁다리는 몇 개 숯불 위에서 하릴없이 타들어가고 두툼한 생풀 몇 단 엎어놓은 모깃불에서는 매캐한 천연모기향이 바람을 탔다.

왁자하던 밥상머리 소리가 잦아질 때쯤 골목은 서서히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배 채운 아이들의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뜨거운 낮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해가 지고 어두워 캄캄해지기 전까지만 가능한 놀이. 술래잡기, 말뚝박기, 구슬치기, 하다못해 잡기놀이까지. 남자, 여자아이 할 것 없이 골목을 가득 채우던 그 때 그 싱싱한 소리 소리들. 아이들 소리, 어른들 소리, 가축들 소리, 가끔 더하여 경운기 소리, 자전거 지나는 소리 등등. 그야말로 그때 그 추억 속 골목은 소리들로 넘쳐났다. 아득하고 푸근한, 지금까지도 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내 낭만 속에 가득 채워진 그 소리들로 말이다.

어둠을 받아 안고 하늘이 서서히 지고 있다. 오늘 내가 앉아 있는 이곳 한여름 밤, 바닷가의 낭만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 둘 불이 밝혀지고 돗자리가 펼쳐지고 치킨을 배달하고, 알 수 없는 음식들이 연거푸 배달 또 배달이 되고. 소리의 키는 점점 높아지다가 하나로 섞여 뒤범벅이 되고 있다. 흥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리로 춤으로 몸을 뒤흔들며 지나가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 안전한 텐트 안에서 스마트폰 게임에 빠진 몇몇 아이들의 안온함. 모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화투패 돌리고 있는 가족들 하며. 흥에 겨워 들뜬 바다와 오늘 이 숱한 사람들의 몸짓과 소리도 그렇게 하나가 되어 또 다른 그들만의 낭만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낭만은 간혹 보약이 되기도 한다. 하루하루의 출퇴근에 지친 어느 날 낭만 한 자락 불쑥 꺼내어 한껏 들이키고 나면 내일을 준비할 힘이 불끈 솟아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날 내가 풀어놓은 낭만에 갇혀 우울하고 쓸쓸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낭만이 갖는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매일 먹는 음식을 맛있는 것만 골라먹을 수 없는 것처럼 낭만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 일에 쫓기며 허겁지겁 걷다보면 지루하고 지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때마다 나는 내 목록에 적힌 몇 가지 낭만들 꺼내먹고 싶다. 재현해 볼 수 없는 낭만이라면 그저 멀찌감치 앉아 꺼내보기만 하면서 말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