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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칼럼]여름 과제

 

대학은 이미 시작했지만 모든 학교들이 곧 방학을 한다. 살던 지역과 가정형편에 따라 달랐겠지만 필자는 어릴 적 방학만 되면 시골에 있는 큰 집과 외가 집에 가서 길게는 2주 정도 머물며 사촌들과 함께 곤충채집을 하며 다른 방학숙제도 했다. 또 논두렁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샘에서 박박 문질러 물거품을 빼고 매운 찌개를 만들어 먹고는 했다. 그 때는 미꾸라지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붕어들이 참 많았다. 어린 우리들은 우물터와 그릇을 엉망으로 만들어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기는 했지만 그 나무람의 억양은 결코 꾸지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으로 알기에 이틀도 못 넘겨 또 미꾸라지를 잡아서 똑 같은 짓을 반복했다. 저마다 잠자리채를 어깨에 하나씩 들쳐 매고 저수지 풀 섶 갓길을 한 줄로 나란히 걸어갈 때면 어김없이 뱀이 가로질러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했다.

반세기가 지나 그 동네를 가보았지만 고기 잡고 수영하던 맑았던 시냇가는 온데간데없고 신작로 옆 그 컸던 한옥 집도 이미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저수지를 메우고 있었다. 공주 부여로 가는 시외버스가 비포장도로 위에 흙먼지 날리며 지나가면 연소되지 않은 매연 냄새를 맡으려고 버스 뒤를 쫒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냄새가 싫지 않으면 배속에 회충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땡볕 저수지에서 종일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즐겼고, 이것은 청소년이 되어 바닷가에 해수욕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박4일 일정이 부족하다고 일 이박을 더하고 귀가하면 등에 잡힌 물집의 고통으로 잠 못 이루고, 후에 물집 터진 자국이 검버섯이 되어 지금도 양 어깨에 그 상흔을 전리품처럼 가지고 있다. 이제는 그늘진 해변가에서조차 한 시간 남짓 노출되는 것도 견디기 힘든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바다보다는 산과 계곡을 찾게 된다.

19세기 초, 청나라 소주의 ‘심복’이 죽은 아내 ‘운이’와 함께 명승고적을 여행했던 잔잔한 추억을 그린 ‘부생육기’가 생각난다. 청나라 시절에도 도시생활은 각박했던지, 잠시 도시를 일탈하여 여행의 운치를 그린 수필로 기억한다. 작년부터 주말이 되면 가평에 가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데 이제 여름이 되어 햇빛이 약한 새벽이나 밤에 움직인다. 주말에 딱 하루 대략 40여 리를 거의 같은 풍광의 길을 왕복하지만 걸을 때마다 전에 못 보던 들풀이 새삼 보이고 색도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걷는 중에는 무언가 생각을 하지만 이내 끊기고 다시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또 다시 사라진다. 걷는 중에 호흡을 깊게 하는 철학적 사고는 불가능하지만 대신 짧고 즐거운 상상이 부가된 개똥철학을 하는 즐거움이 있다. 어릴 적 첫사랑,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그 얼굴을 억지로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처음 애간장 태우던 때의 이미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우연히 보게 되면 반가울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생사조차 모르면서 정작 보면 이 나이에 서로 추할 뿐이지 뭘 보나 하는 쓸데없는 결론까지 내린다. 걷는 것은 운동이 되지만 독서를 하거나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머리를 말랑거리게 하는 효과도 있다.

이미 은퇴하신 선배들께 하루를 어찌 지내시느냐고 종종 묻는다. ‘백수과로사’라는 말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남아돌아가는 시간을 어찌할 바 없어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말은 건강과 약간의 돈이라고 한다. 그리고 머쓱하게 이젠 마누라밖에 없다고도 넌지시 덧붙인다. 소시 적에 배우자한테 좀 더 잘했더라면 퇴직하고 이런 구박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거다. 그러나 아내들은 남편을 ‘삼식이’라고 투덜대며 늙으면 남편은 짐이라서 차라리 없는 편이 좋다고들 농담하지만 속내는 그래도 나이 들수록 부부가 함께 건강 장수하면서 정겹게 손잡고 나들이하기를 바라고 또 부러워하는 듯하다. 늙으면 어리고 젊었던 시절을 보기 위해 과거 사진첩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늙으면 사진 찍기를 꺼려하는 것은 자신의 젊고 예뻤던 기억만 추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올 여름엔 손잡고 더 늙어서 추억해 볼 사진을 만들어 보자.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그나마 남은 생애 중 가장 젊은 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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