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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들을 빛나게 해준 가요…”

음반 낸 녀성작곡가 김경애씨
가장 아끼는 곡 15수 뽑아 제작

 

개혁개방 이후 대중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중국조선족음악은 발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인민의 삶의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하는 대중음악의 인기는 아주 뜨거웠다. 그리고 열풍의 중심에는 조선족 녀성작곡가 김경애(62세)씨도 있었다. ‘오빠의 편지’, ‘교정의 종소리’ 등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가요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불려지고 있다.

11일, 김경애 작곡가가 음반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김경애 작곡집’이라고 명명한 음반은 작곡가가 스스로의 작곡생애에 대한 총화와도 같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아끼는 곡 15수를 뽑아 심혈을 기울여 음반을 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 또한 자기의 오랜 소망이였다며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예술적인 재능을 보인 그녀였지만 전문적인 예술인이 되기 위한 길에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러다가 1977년, 김경애씨는 길림성 교하탄광사범학교 음악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82년, 연길시 문화관에 전근해오면서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작곡가로서의 립지를 단단히 굳혀준 작품은 ‘오빠의 편지’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김경애 작곡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는 로산전투(1984.4∼1993.4)로 전국에서 한창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작은 풀’ 등 가요들이 인기 있을 때였다. 종전의 힘차고 빠른 절주의 곡이 아닌 서정적인 멜로디로 전쟁을 그렸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으로 이끌어낸 음악의 반전의 효과에 김경애작곡가는 깊이 매료되여 있었다. 마침 그런 때, 김욱 시인이 ‘오빠의 편지’라는 가사를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이 서정적인 가사는 순간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곧 강렬한 창작령감이 샘 솟기 시작했다.

“가사를 읽으면서 페허가 된 전쟁터와 자옥한 포화 속을 뚫고 한통의 편지가 날개가 돋친 듯 앞으로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이후 이노래는 그때 19살이던 신인가수 구련옥에 의해 불려지면서 히트를 치기 시작했고 덕분에 구련옥도 이 노래를 데뷔작으로 이후 연변 가요계의 인기가수로 떠올랐다.

음반에 수록된 곡중 그녀가 가장 아끼는 곡이 있다. 바로 김택만 작사, 차해룡 노래의 ‘추억의 강’이다. 오래 전 그녀가 어느 한 잡지를 펼치다가 우연히 보게 된 가사인데 당시 너무 좋은 나머지 작사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거기에 곡을 붙였던 작품이다.

돌이켜보면 거창하게 산 삶이 아니지만 김경애 작곡가는 음악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얻은 소소한 행복들이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었고 가요가 있어 자신의 젊은 날들이 빛났다고 말한다.

“살면서 누구나 많은 갈등을 합니다. 어떻게 살가? 이제는 뭘 더 하면 가장 좋을가? 나로서는 나이가 들어도 감수성을 잃지 말고 생활에서 여러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또 특히 요즘처럼 연변가요가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시대에 연변의 음악인들은 좀더 나은 창작의 길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요가 성공하려면 작곡가 혼자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작사, 편곡, 록음, 가수 등 다방면의 힘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러니 다 같이 현황에 머물지 말고 널리 접수하고 광범하게 배우면서 그 속에서 우리 음악의 원 맛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박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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