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과일
/하재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고백할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풀밭에 떨어져 쉽게 뒹구는 것들 때문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대체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또 뭐람!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누구나 제 몸 속 작은 방 하나쯤 들이고 산다. 익기 전에 떨어져 뒹구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깊은 곳의 울림을 듣노라면 나도 서둘러 떨어진 호기심 많은 소녀이며 방황하는 사춘기였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론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는 한 뼘 더 성숙한 또 다른 내가 완성되곤 한다. 찬란했던 청춘의 한 때, 꿈 꿀 수 있는 자유와 이탈할 수 있는 희망 앞에서 맘껏 불량스러웠던 호기어린 날들, 호기심 많았던 멍 자국들, 안으로 더 단단해지는 껍질 속 생이 성장해가고 있다. 불량과일 이라니, 이 얼마나 유혹적인 이탈인가, 달콤한 황홀인가
/정운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