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정윤희의 미술이야기]이상화된 어머니의 모습, ‘대공의 성모’

 

르네상스 인의 총애를 받는 예술가가 있었다. 단언컨대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가장 사랑받는 화가였으며, 적어도 수십 호의 명망 있는 가문들의 저택에는 그가 그린 성모가 하나씩은 걸려 있었다. 그 누구도 성모를 그만큼 아름답고 우아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 이를 의미심장하게 여겼던 교회 내부에서는 심지어 그를 추기경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였으며, 37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숨졌을 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당시에는 카톨릭 교회로 쓰이던 판테온 내부에 그의 시신을 안치시켰다.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정 덕분에 교황과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든든한 여러 후원자와도 잘 지냈으며, 덕분에 한창 시절 두둑한 후원을 받으며 작품에만 열중할 수 있었고, 그의 공방에는 그 어느 화가의 공방보다 더 많은 견습생들이 드나들며 일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이다. 생전에 그토록 큰 명성과 존경을 받았던 라파엘로건만, 사후 불과 100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후대인들에게 전혀 다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를 위시한 바로크 시대 화가들은 더 이상 라파엘로부터 배움을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때로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두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보다는 재능과 열정이 떨어지는 화가, 이 두 사람이 이룩한 업적을 그저 받아먹기만 했던 화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크고 깊은 과학적 지식으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레오나르도와 정력적이고 역동적인 인체를 묘사했던 미켈란젤로가 쌓아올린 혁신을 무마시키며 회화의 역사를 거슬러버린 반동적인 예술가로 묘사되곤 한다. 1848년 영국에서 결성된 ‘라파엘 전파’란 그룹은 자신들이 혁파시켜야 아카데믹한 화풍을 일컬어 라파엘이라 칭했다.

라파엘로의 생전의 성공은 때론 미켈란젤로와 비교가 되곤 하며, 이 때문에 라파엘로는 후대인들에게 더더욱 얄미운 인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보다 8살 위였던 미켈란젤로 역시 큰 인기를 누린 예술가였지만 모두와 두루 완만하게 지냈던 라파엘로와는 달리 후원자와 늘 문제를 일으켰으며, 그들과 자주 다투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맡긴 것도 그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제를 맡김으로써 모두에게 망신시키고자 했던 라파엘로의 계략이었다는 후문도 있다.

물론, 시대와 보는 이에 따라 보기 드물게 엇갈린 평가가 존재했던 것일 뿐, 라파엘로에 대한 평가가 모두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라파엘로를 재평가한 이들 중에서는 그를 미켈란젤로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다채로운 포즈와 표정을 지으며 육체미의 극치를 펼치게 된 이래, 한때 르네상스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회화 분야에서는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이미 고갈되었다고 여기는 풍토가 있었다. 그들은 그보다 더 뛰어나고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작품 속에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단순 복제하기만을 반복하곤 했다. 인체의 신비도, 우주의 신비도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으며, 예술 안에서 과학의 역할은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바로 이때 라파엘로는 회화의 목적과 지향점을 살짝 다른 곳으로 비틀었던 화가였다. 라파엘로를 계기로 르네상스 후기 회화는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대공의 성모’는 르네상스로부터 멀고 먼 시간을 거친 오늘날에도 이상화된 성모의 모습이란 바로 저런 걸 의미한다는 인상을 전해준다. 필자의 유년 시절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신앙심 깊었던 어머니가 바로 이 작품이 그려진 엽서를 바라보며 감동받곤 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다비드의 나폴레옹과 밀레의 만종 못지않게 우리는 주변에서 라파엘로의 작품을 자주 접해왔을 것이다.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 역시 그토록 평정심과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꼼꼼하게 써내려간 그의 저서에서 라파엘로에 대한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한다. 사실 길게 늘어진 베일과 붉은 드레스 속의 부드럽고 단아한 육체는 실제 인간의 육체와는 다르게 그려졌다. 라파엘로는 실제 모델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지 않기로도 유명한데, 그는 이상화된 모델을 마음속에서 그리곤 했던 것이다. 라파엘로 이래 정확성과 사실성이라는 미의 기준을 이탈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미술은 한동안 길을 찾아 헤맸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