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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칼럼]성실한 거짓말

 

지상에서 가장 뻔뻔한 직업군을 꼽으라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들은 당연히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질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는 청문회를 하거나 선거철이 되면 고관들과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거짓공약 그리고 자신과 연루된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한 은폐 조작, 정치인의 은퇴선언 이후 다시 정계복귀 등 정치인들의 다양한 행태의 역사가 깊다. 이를 바라보면 이것이 정치가의 특성인가 싶다. 그러니 국민들이 볼 때 이들이야말로 가장 뻔뻔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거의 우상화 정도까지 갔던 정치인들도 더러는 있었다. 물론 이 분들도 정치가로서 혹은 대통령으로서 재임을 하는 중에는 거짓공약을 아주 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정치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어느 선까지는 특이할 만큼 너그럽게 포용하고 있다. 그 어느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과 교육수준, 남녀노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공통적으로 국민들이 못견뎌하는 그 마지노선은 특정 정치인의 연속되는 뻔뻔한 언어와 행동이다. 정치인들 중에서도 국민 대부분이 속아 넘어갈 것 같이 거짓말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성실하게 했던 거짓말이 후에 밝혀지게 되면 그 말을 믿었던 사람들이 받을 상처는 더 크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거짓말도 상황에 따라 그 수위를 조절한다.

가정에서도 그러하다. 과거 어른들은 자식들의 수업료 납부기일을 종종 넘겨서 주셨다. 꼭 돈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졸라대면 내일, 모레, 혹은 다음주 안에는 꼭 주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그런 약속을 냉큼 믿지 않았다. 빚쟁이들의 독촉도 그러했다. 다음주면 홍콩에서 정말 배가 들어올 듯이 성실하게 설명하면 지독했던 빚쟁이들도 물러섰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그 한마디가 대체로 거짓말이었다. 1960~1970년대는 대부분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가난 혹은 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들 얘기했다. 인정이 많은 국민들은 거짓말임을 알면서 넘기고는 했다. 요즘은 만우절의 민폐가 너무 커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만 남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무겁고 깊은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아서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들이 너무 성실해서 그 말에 속은 후에도 거짓말 한 이를 탓하지 아니하며 서로서로 명랑한 거짓말로 하루를 즐겼다. 경비가 전혀 들지 않는 일종의 작은 축제이기도 했다.

필자는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특히 학생들에게 실현하기에 조금 까다로운 공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있었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대학구조개혁 계획을 발표하는 총장의 말 중에 헛된 공약, 혹은 거짓말도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면서도 믿어주고 넘어가주는 경우도 있다. 한 기관의 책임자로서는 퍽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치학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정치란 국민들에게 콩을 팥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터무니없는 정의였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콩을 팥이라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평소 언행과 행실에 대한 신뢰가 먼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다음 그의 언변에는 진지함과 성실함이 묻어나야만 한다. 사람들은 콩이 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는 설득을 당해서가 아니라 설득자의 성실함을 보고 콩을 팥으로 믿어주는 척 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이 효과는 그 한마디를 누가하느냐에 달려있다. 거짓공약, 거짓말을 할 때는 성실하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평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성실하게 거짓을 말할 때의 위험은 몇 배가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아주 성실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리도 없겠지만 불가피하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만 할 경우에는 평소 타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인지한 후에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실한 거짓말일지라도 나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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