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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찬란한 금빛 나체의 여인,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당혹감을 주는 여인의 누드이다. 우선 여인의 나체가 눈부실 정도로 밝은 금빛을 띠고 있다. 티치아노로 하여금 베네치아에서 큰 명성을 얻게 하였던 바로 그 빛깔이다. 여인의 실루엣은 여느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 부드럽게 흐른다. 하지만 이 여인의 나체는 그 어떤 누드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내게 이 그림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금빛 나체보다는 화가를 주시하는 여인의 당당한 시선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그 시절 여느 나체의 여인이 그러하듯 은밀하게 혼자만의 공상에 빠진 여인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 어둡고 외진 장소에서 차분한 분위기로 나른하게 몸을 뉘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더라면 보는 이들에게 조금 더 편안한 기분을 선사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편안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은 아니다. 너무나 당당할 뿐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녀가 누워 있는 장소는 백주대낮의 방안 고급 소파 위이며, 화가를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이 여인이 베네치아인답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녀는 우르비노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 활기를 펴기 시작한 베네치아인들 역시 이처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였다. 피렌체와 로마에서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면,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심부에서 활동하던 3인방은 그 명성에 걸맞게 이탈리아 각지에서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이 3인방 중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바로 티치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을 언급하고 나니 떠오르는 일화가 한 가지 있다. 티치아노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난 뒤 미켈란젤로가 이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이 친구는 색을 참 인상적으로 쓰는군. 하지만 소묘를 잘 배우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야.” 완벽한 구도와 균형미를 중요하게 여겼던 이탈리아 중심부의 화가로서는 티치아노의 작품이 인상적이긴 해도 어딘가 함량미달로 느껴졌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고집쟁이에 심술쟁이었던 미켈란젤로였으니 라이벌에 대해 곱지 않은 표현을 쓴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티치아노에게 구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작품에서 색채가 구도보다 더욱 근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의 엇갈린 관점은 지금까지도 후배 화가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공방이 펼쳐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색이 먼저냐, 구도가 먼저냐 하는 문제 말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의 대척점이 구도와 색채의 문제를 넘어서서 다른 관점으로 다가온다. 한 마디로 미켈란젤로는 고지식한 예술가였던 반면, 티치아노는 자유분방했던 예술가였다. 르네상스의 좋은 시절은 로마를 지나 베네치아로 이동하고 있었다. 교황청이 위치하고 있었던 로마는 찬란한 고대 유산의 집산지이기도 한데, 미켈란젤로는 교황으로부터 달달 볶이면서 고대 유산과 교회와의 조화를 이루며 건축과 도시계획을 담당했다. 고대의 유산도, 교황청도, 종교도 매우 무거운 주제였고, 당연히 로마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예술가들은 매순간 매우 진중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베네치아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지중해를 거점으로 일찍이 무역업이 발달했다. 또한 베네치아에는 교황의 자금을 관리하던 가문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스위스와 같은 위치였다고 할까, 아무튼 베네치아는 교황의 구린 구석도 숨은 비밀도 잘 알고 있었다. 교황은 대대로 베네치아를 장악하려고 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베네치아인들에게 제대로 약점을 잡힌 터라 이들 만큼은 자기 뜻대로 쥐락펴락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회가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심하게 억압했던 시절에도 베네치아인들은 제제를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탤릭체는 바로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서 계발된 서체인데, 기존의 고딕체보다 훨씬 경제적이었던 이 서체로 말미암아 베네치아에서는 출판업이 엄청나게 성행했었다고 한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는 베네치아인들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했으며, 지중해에 드는 찬란한 빛살과 아울러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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