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고農高
/이덕규
들판으로 심부름 가던 뒷말 숙영이가
으슥한 벼 포기 그늘 밑으로 수줍게
하얀 엉덩이를 디밀 때
이제 막 들길 입구에 접어든
삼 년생 4H미루나무 두 그루가 가던 길 멈춰 서서 휘청휘청 짝다리를 흔들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봐도 다 안다는 발랑 까진 나팔바지 가을과
다 봤는데 도통 모르겠다는
얼간이 가을이 나란히
아무것도 모르는 초가을 들판 속으로 땡땡이를 치는 길이었다
가도 가도 투명하기만 해서
보이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애지( 2017년 봄호)
농고, 이 얼마나 아득한 그리움의 단어인가! 내 고향 이천에도 한 개의 여고와 두 개의 남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천농고, 다른 하나가 이천북고였다. 오빠가 적을 두고 있어서인지 나는 <農高>란 교표의 교모와 옅은 카키색 교복만 봐도 가슴이 뛰곤 했었다. 정말로 ‘가도 가도 투명해서 보이는 게 전부였던 시절’, 은근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 설레었었지. 소피를 보는 여학생의 엉덩이를 상상하며 짝다리 흔들던 미루나무는 누구였던가. 발랑 까진 나팔바지 가을과 초가을 들판 속으로 땡땡이치던 얼간이 가을은 우리들의 사춘기를 물들이던 그 오빠들 아니었던가. 세상의 모든 농고생들에게 그 농고생 오빠를 연모하던 그 시절 모든 여고생들에게 이 시의 정경은 추억을 소환하며 짐짓 미소를 머금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의 연결고리이다. /이정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