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생활에세이]바람새 마을

 

얼마나 걸었을까, 또박또박 내딛는 발끝에서도 한 자락 바람이 이는 듯하다. 저만치 억새 주억거리는 모습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쉼 없이 일렁거리며 시간을 실어 나르는 바람의 본성은 분명 내 삶과도 내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바람처럼 던져진 세상 속에서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한 것이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도, 내가 간절히 원해서도 아니다. ‘그저 바람처럼 일렁거리며 쉼 없이 걸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나는 이미 바람새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누군가 가꾸었을 코스모스가 지천이었다. 꽃잎마다 묘하게 다른 미소를 머금고 발 닿은 사람 다 불러 세웠는지 발자국이 다닥다닥 남아있는 꽃밭 사이로도 가을은 진득하게 묻어났다. ‘저 꽃잎 얇게 펴서 끼워 둔 아득하게 밀려난 내 여고 시절처럼 나의 가을도 저렇게 성큼 다가왔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비로소 하늘이 보였다. 구름 다 밀어내고 환하게 웃어젖히는 바람새마을의 하늘, 올려다 본 그곳에는 그 어떤 질문도 대답도 필요 없을 듯 보였다. 마주보는 빛깔만으로도 충분히 마음 나눌 수 있기에 그저 그 하늘 끼고 묵묵히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우아, 잠자리다. 잠자리다.” 바람새마을 안 소풍정원을 가로지르는 어린아이들의 말소리. 아장아장 걷는 발소린가 하면 금세 자지러지게 웃음 터뜨리다가도 이쪽저쪽 언제 튀어 오를지 모르는 알록달록 봄꽃 같은 그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소풍정원은 이내 들뜨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돗자리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어른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 웃음소리까지 환하게 피어나게 했다. 뿔뿔이 흩어져 제법 진지해지다가도 한 줄 서기 하며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바깥놀이 나온 저 초롱초롱한 어린 사람 꽃들이야말로 더 없이 맑고 아름다운 소풍정원 최고의 꽃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걸어 들어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샛길 사이로 오롯이 열리는 자그마한 호수들은 제각각 색깔이 달랐다. 어느 궁녀의 옷자락인 듯 소박하게 내려앉는 햇살의 말문, 윤슬에 간지럼 타는 자잘한 수련 잎들의 오밀조밀한 흔들림까지. 갈대 군데군데 섬처럼 품은 호수는 어미의 품인 듯, 마음인 듯,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자박자박 호숫가를 걷는 내내 둔덕너머 진위천 물소리가 우렁우렁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옛날 선잠에 듣던 어머니의 옛 이야기처럼 말이다.

푸근한 마음으로 바람새마을 돌아 나오는 내내, 원래는 폐천 부지였다는 소풍정원 끝자락 에서 만난 철 지난 연잎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푸르디푸르렀던 싱싱한 연잎들 때 기다려 하나하나 접어거두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삶과도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한 때는 누구보다도 우아하게 피워 올렸을 꽃, 그 여름들 소임 다 끝냈을 때 비로소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을 줄 아는. 원래 자기 삶이 시작된 늪 속으로 미련 없이 침잠해 들 줄 아는 연의 거두어 가는 삶을 배우고 싶었다. 눈이 부시게 화려한 꽃들이 지천인 세상을 향한 욕심을 거두는 일 쉽지 않겠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하나씩 연습해보고 싶다. 가을 연이 연잎을 한 장씩 늪 속으로 천천히 거두어들일 줄 아는 것처럼 말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