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산책]나의 가계
[아침시산책]나의 가계
  • 경기신문
  • 승인 2017.12.07 18:26
  • 댓글 0
  • 전자신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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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계

/박완호

나의 가계는 고향집 툇마루 먼지 뒤집어쓴 채 엎어져 있던 낡은 거울입니다. 끝 페이지가 찢어진 연애소설의 누군가 침 바른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자국입니다. 흐릿해진 글자들을 덮으려다 떠올린 초등학교 옆 골목, 달맞이꽃 핀 마당을 훔쳐보는 까치발입니다. 을지로에서 광화문, 백만 인파를 헤치고 달려가 기어이 만난 친구의 허술한 웃음입니다. 그의 어깨 너머 눈 시리게 나부끼는 촛불 너울입니다. 광장의 밤하늘을 맴도는 새들, 잿빛 허공에 새겨지는 속 맑은 울음입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로만 알다 뒤통수 된통 얻어맞고도 또 펜을 드는 난, 아직 나를 다 알지 못합니다.

- 시와 문화 (2017년 여름호)


 

누군가 말했지요, 시인은 神이 놓쳐버린 포로라고. 무엇에게든 복속을 거부하지만 詩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 또는 주술처럼 詩魔에 휘둘린 사람. 그러므로 시인의 가계는 고향집 툇마루의 먼지 앉은 거울로부터 찢어진 연애소설의 침 바른 글씨자국, 달맞이꽃 핀 마당을 훔쳐보는 까치발을 지나 광화문 촛불행렬에서 운 좋게 만난 벗의 어깨 너머 너울대는 촛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생애를 관통해온 모든 추억과 경험치의 총량입니다. 시인의 가계가 저러하거늘 그의 시의 질료는 가슴 시린 추억을 비롯해 현실 참여적 리얼리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확산되겠지요. 슬픈 천명인 줄로만 알고 심혈을 기울여 시업에 몰두했는데 뒤통수 된통 얻어맞았다는 고백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시 펜을 드는 화자에게 시인은 분명 천명인가 봅니다. 시를 버리려다, 아니 도망치려다 이 시를 읽고 다시 마음 다잡는 날입니다.

/이정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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