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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황병기 명인

가야금은 6세기경 가야에서 생겨났다. 삼국사기‘악지(樂志)’에는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고, 악사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위한 12곡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우륵은 551년에 신라로 망명했다, 그후 진흥왕의 후원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대악(大樂)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 음악을 상징하고 있다. 20세기 들어선 걸출한 가야금의 명인들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창작곡이 탄생, 한국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그들 중에서도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이자 독보적 존재로 현대 국악 영역을 넓힌 최고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런 만큼 그 이름을 수식하는 용어도 다채롭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야금 명인’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와 세계화 선구자’ ‘오선지로 기보한 최초의 가야금 독주곡 작곡자’ ‘전통의 가치로 전위를 감싸안은 예술가’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그렇다.

황교수가 가야금을 처음 접한 것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 경기중학교 3학년 때다. 경기고 재학생 시절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대학은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국악과가 없어 국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변함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에 국악과가 개설되자 달려갔고 1974년부터 이화여대 한국 음악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면서 국악을 인류 보편의 정서에 맞닿은 세계의 예술로 한층 더 확장시키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발표했다. 1975년 10월7일 초연 당시부터 현재까지 현대 한국음악계 최대의 충격을 안겨준 문제작 ‘미궁’을 비롯, ‘침향무’ ‘비단길’ ‘춘설’ 등의 작품집들은 국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71세때 내놓은 5집 앨범 ‘달하노피곰’은 그의 예술적 성취를 더 눈부시게 한다. 가야금 연주 수록곡 8곡을 통해 국악의 새 지평을 더 넓혀서다. 그런 그가 어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면하길 빈다.

/정준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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