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생활에세이]낙숫물 소리

 

요즘엔 봄을 알리느라 그런지 비가 잦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낙숫물 소리에 잠을 깨는 아침 조금이라도 빨리 봄비를 만나고 싶어 따뜻한 잠자리의 유혹과 매달리는 새벽잠을 뿌리치고 일어난다. 아파트에 사는 분들은 낙숫물 소리의 정겨움을 모른다. 한 방울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청아한 소리, 그 소리를 두고 어떻게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낼 수가 있을까.

어느 깊은 산중에 화전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 딸 남매를 기르며 단란하게 살았다. 부지런한 남자는 새로 화전을 일굴 땅을 일구느라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다. 캄캄한 산길을 혼자 길을 걸어오다 그만 발을 헛딛고 벼랑으로 떨어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웃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옮겼으나 며칠 못 가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된 아내는 힘들게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새벽부터 밤까지 남편 없이 고된 일에 매달리다 모처럼 방에 있으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바느질거리를 손에 든 채로 병든 닭처럼 졸다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낙숫물 소리에 잠이 깨어 방을 살펴보니 밖은 깜깜한 밤이었다. 저녁도 굶고 그대로 잠이든 아이들이 딱해서 이불을 잘 덮어주고 부엌으로 들어가 불을 지핀다. 한참을 불이 타고 있는 아궁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남편이 그립고 아이들과 살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마음을 추스르려 뒤꼍 우물로 나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대로 비를 맞고 서있었다. 그런데 낙숫물 소리에 여느 때와는 다른 소리가 섞인 것 같다. 이상한 소리의 발원지는 김칫각 처마 밑이었다. 처마 밑을 파보니 조그만 노구솥이 묻혀 있어 들어내 뚜껑을 열어본 여인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노구솥 안에는 금덩어리가 가득했다. 순간 마른침이 꼴깍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이 금덩어리면 평생을 고생 안 하고 아이들도 호강시키며 살 수 있는 재물이다. 여인은 노구솥 뚜껑을 덮고 처음 있던 대로 묻었다.

밤새 뒤척이다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베개를 뜯고 그 속에 감추어 둔 봉투를 뜯었다. 그 봉투는 시집오기 전날 친정아버지께서 주신 것이었는데 위기가 왔을 때 열어보라고 하시는 말씀에 지금껏 간직했었다. 첫닭이 울고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였다. 그리고 몇 가지 짐을 챙겨 동이 트기 전에 동네를 빠져 나왔다.

여인은 한양으로 와서 삯바느질을 하며 아들은 절에서 공부를 시켰다.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과 딸을 앉혀 놓고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두 부부는 원래 천민이 아니었다. 친정과 시댁은 아버지들이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였다. 신랑집이 역모에 연루되어 삼족을 멸하는 화를 당하게 되자 친정도 그 불길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우선 신랑을 구해내고 미리 산속에 금을 묻어놓고 둘을 짝지어 숨어 살게 했다.

친정아버지는 모든 일에 대비해서 딸에게 비망기를 적어 주었다.

금덩어리는 크나큰 유혹이었다. 그 금덩어리는 아이들에게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묻어놓고 야반도주를 해서 뜻을 세우고 매진하도록 격려했다. 그리고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고 친정과 시댁 양가의 권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봄비는 또 다시 내리겠지. 땅을 열고 새 순을 틔우고 묵은 생각을 씻어 주기 위해서.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