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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한반도 최강의 남옹성

 

아름다운 성곽이 지금은 관광시설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모두의 목숨을 담보하는 시설로 매우 중요하였다. 그래서 재료의 사용에도 신중하게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돌이 벽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은 불에 약해 화공을 받을 경우 터지고 무너져 내려 이미 중국에서 벽돌로 성벽을 만들고 있었다. 당시 중국을 다녀온 실학자들이 벽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수원성이 벽돌로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벽돌의 제작과 시공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전체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옹성과 일부 공격시설에만 채택하게 된다.

성문(城門) 부분은 보통 2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문짝이 목재로 되어 불에 타기 쉬운 점이고 둘째는 성문의 상부가 돌로 만들어져 역시 불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성문은 철갑을 입히지만 철갑 또한 얇아 강한 불에 녹기 때문에 그 효과가 작다. 따라서 물을 부어 불을 끄는 장치를 추가하게 되는데 바로 오성지(五星池)가 그것이다.

화성성역의궤 도설 남옹성편에는 ‘북옹성과 다른 점은 홍예재료와 타구와 현안의 개수이고 나머지는 같다.’라고 되어 있다. 남·북옹성의 설계는 같은데 3가지 요소가 다르게 시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홍예재료에서 북옹성은 성문 상부를 화공(火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불에 약한 돌 대신 벽돌로 만들어야 하나 을묘년 행사로 인해 급하게 축조된다. 그래서 옹성 몸체만 벽돌로 만들고 가장 중요한 출입구 홍예를 돌로 만드는 오류를 범한다.

이에 비교해 남옹성은 을묘년 행차가 끝나고 공사를 시작하여 북옹성에서 축적된 기술과 겨울이 아닌 봄에 시작하여서 한 달 만에 순수 벽돌홍예와 벽돌옹성을 만들어낸다. 한반도에 많은 옹성이 남아있지만 벽돌옹성는 4개만 존재하고 모두 수원화성에 있다. 이 중 남옹성만 유일하게 벽돌홍예를 가지고 있어 한반도에서 가장 우수한 방어능력을 지닌 최고의 옹성이 된 것이다.

북옹성 여장의 타구(타와 타 사이)와 현안(懸眼, 성벽 위에서 아래로 내리 뚫은 구멍으로 근접한 적을 공격) 개수는 각각 16개지만, 남옹성의 타구는 20개이고 늘었고 현안은 12개로 줄었다. 남옹성에서 숫자를 줄인 이유는 현안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안에 사용되는 부재는 모두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기 일일이 현장에서 제작해야 하여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유사시에 근접한 적군을 막는 것보다 원거리의 적을 막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현안에 투자를 줄이고 대신 타구를 더 많이 만드는 결과로 보인다.

미관(美觀) 부분에서 북옹성은 타구와 현안의 위치가 일치하고 있어 보기 좋지만, 남옹성은 타구와 현안이 위치가 일치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정조는 ‘성의 웅장하고 미려함은 적의 기세를 빼앗는 방법이다.’라고 축성(築城)에 대한 미학(美學)을 피력하고 있지만, 남옹성 현안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한반도 최고성능을 가지고 있던 남옹성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3년 홍예문이 헐리고 1923년에는 개구부가 더 많이 철거되면서 위대한 흔적은 사라져 버린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수원화성의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복원이 이루어져 개별시설에 대해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벽돌홍예가 아닌 돌홍예로 복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화성성역의궤에서 벽돌을 사용하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벽돌을 사용한 목적이 공사 기간을 줄이는 방법이라 생각하게 했다. 또 북옹성 홍예를 돌로 만든 오류를 서술하지 못한 점도 복원 오류의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잘못된 것도 역사이기 때문에 한반도 최강의 옹성이라는 명성을 되찾고자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복원에서는 더 많은 연구와 공개적인 논증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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