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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아카시아 그늘의 오후

 

벌써 아카시아가 피는가 싶더니 지고 있다. 상가를 벗어나 조금만 외곽지대로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카시아가 향기로 유혹한다.

개구쟁이 친구들은 가시가 날카로운 나무에서 꽃을 따 꿀을 빨아먹기도 했고 여자애들은 하나만 달라고 졸라서 먹었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데 나만 곧바로 뱉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은 달고 향기롭다고 하는 꽃에서 비린내가 났다. 날콩을 씹었을 때처럼 비린 맛이 역해서 한참이나 퉤퉤 소리 나게 침을 뱉고 물로 입을 헹궜다.

줄을 맞추어 나란히 달린 잎으로 행운점을 치는 것도 재미있었다. 뭐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된다, 안 된다 하면서 잎을 한 장씩 떼는 데 마지막 남은 잎이 된다면 이루어지는 확률 50%의 점이었다.

엄마가 시장에서 맛있는 걸 사온다, 안 사온다. 오늘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한다, 안 한다 같은 아주 미약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었지만 아카시아 잎이 몇 장 남지 않을 때부터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된다는 차례에 잎을 남기기 위해 끝 부분을 손톱으로 꼬집어 조금 떼어내면서 안 떨어진다고 다시 한 번 떼면서 행운을 조작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동네 젊은 엄마들이나 서울서 오는 언니들의 고불고불한 파마머리는 부러움 자체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해서는 안 되는 넘지 못할 벽이었다. 개울가에 있는 아카시아 그늘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세수를 하고 손으로 물을 찍어 머리에 발랐다. 우리 중에 키가 제일 큰 친구가 나무에 올라가 언덕 밑으로 늘어진 가지를 휘어잡고 늘어뜨렸다. 나하고 다른 친구는 부지런히 아카시아 줄기를 뜯었다. 행운점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잎을 순서도 없이 떼어내고 국수가락 같은 줄기를 한 움큼씩 만들었다.

언젠가 따라가 본 미용실 풍경을 떠올려 본다. 미용사 아줌마가 닭고기 발라먹고 남은 뼈다귀 같은 걸로 머리를 돌돌 말아 노란 고무줄로 얽어매고 모자를 쓰고 있다 중화제라고 하는 약을 스펀지에 적셔 바르고 또 한참 기다렸다 풀면 제멋대로 있던 머리들이 고불고불 예쁘게 되는 게 신기했다.

아카시아 줄기를 반으로 접어 그 사이에 머리를 넣고 돌돌 말아 끝을 묶었다. 보이지 않은 뒤쪽 머리는 서로 말아주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놀기도 하고 조그만 물고기들을 놀래주기도 했다. 틈틈이 머리가 말랐는지 손으로 만져가며 확인을 했다. 그래도 심심하면 공기놀이도 하고 굵은 막대기로 땅에 글씨를 쓰고 흙으로 살짝 덮었다가 알아맞히는 글씨찾기 놀이도 하며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머리가 말라 아카시아 줄기를 풀었다. 대성공이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어느 흑인부족처럼 뽀글거리는 머리를 보며 좋다고 깔깔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저만치 집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섰을 땐 벌써 산 그림자가 좁다란 시골길을 삼키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늦도록 오지 않아서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는데 내 머리를 보시고는 말문이 막혀 벼르던 마음도 누그러져 머리부터 살펴보셨다. 그리고 집에 오던 길에 있었던 얘기에 폭소를 터뜨리셨다.

아마 요즘처럼 카메라가 흔한 시절이었으면 지금까지 사진이 남아 나를 놀리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파마하고 싶은 사람은 더 늦기 전에 아카시아 나무를 찾아가서 꽃도 먹고 머리도 하면 일거양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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