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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아르장퇴유의 화가들

 

 

 

1870년 파리지앵의 화가들에게 매우 고단한 시절이 찾아왔다. 보불 전쟁이 발발했고 파리는 함락되었으며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다. 르누아르는 징집을 당했고, 오랜 그의 동료인 바지유는 자원입대하여 전투를 치르다가 목숨을 잃었다. 카미유와 여행 중이었던 모네는 간신히 징집을 피했다. 그전에도 이들은 평론가들의 비아냥 속에서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에는 도시의 생기발랄함 속에서 함께 작업할 수는 있었다. 허나 전쟁의 참혹함은 이들이 그려왔던 생생한 도시의 모습을 그저 꿈만 같은 풍경으로 보이게 할 뿐이었다.

파리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화가들은 아르장퇴유로 모여들었다. 모네는 마네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고, 전선에서 빠져나온 르누아르는 친한 동료 화가들을 따라서 이곳으로 왔다. 르누아르는 모네와 오랜 지기 동료였고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분명 같은 장소를 거의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렸을 법한 작품들이 이들에게서 완성되고 있었다. 아르장퇴유라는 곳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이들이라 하더라도, 인상주의 작품을 좋아하고 있다면 분명 이곳은 그들에게 낯설지 않은 장소이리라.

모네와 르누아르는 닮은 구석이 많은 화가들이었다. 이들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아서 기예에 가까울 정도였고, 둘 다 빛이 주는 충만한 영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똑같은 실험을 펼치고 있었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할 뿐, 이론적 다툼과 말씨름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점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즈음 두 사람의 특징은 확연히 갈라져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떤 게 누구의 그림인지 구별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아르장퇴유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은 그 둘만이 아니었다. 마네 역시 항구를 그렸으며 심지어 그의 붓질은 어느 때보다 물결치고 자유로웠다. 허나 마네는 모네의 가족들을 풍경과 조화시키는데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 카유보트와 시슬레도 아르장퇴유의 풍경들을 그렸다. 카유보트는 구성에 남다른 감각을 발휘했고, 시슬레는 작품에 서정성을 담았다. 파리지앵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휴양지였던 아르장퇴유는 그 잔잔하고 단순한 분위기의 매력을 그렇게 십분 발산하고 있었다. 물처럼 유유히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예술가들은 동일한 빛 아래에서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며 고도로 집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상주의’라 일컫는 회화의 특징들은 바로 이곳에서 더더욱 견고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을 부서뜨리는 구름과 물결을, 이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예술가들은 그처럼 경이로운 세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구곤 한다.

비평가들의 혹독한 평가는 이들에게 뛰어넘어야 할 숙제였다. 도시가 수습되고 나면 다시 전시를 열 수 있을 것이고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도 곧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아르장퇴유 시절 모네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텐데, 물이라면 그가 너무도 잘 그리는 대상이어서 그 방면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이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았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묵직하게 걸어갔다.

르누아르 역시 빛과 색채 실험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이후 그에게는 좀 더 복잡한 길이 펼쳐졌다. 아르장퇴유를 떠나 알제리로 그리고 이태리로 다른 종류의 영감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나야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이후 몇 번의 낙선전을 함께 했지만 전시가 거듭될수록 각자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르장퇴유로 흘러들어온 돛배들은 그렇게 제각각 방향을 틀고 있었다. 르누아르가 라파엘에게서 답을 찾기 시작했을 때 그의 동료들은 그가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마네는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낙선자라고 여기지도 않았기에 낙선전에 함께 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인상주의 작품이고 부르는 것들은 그 특징이 정말 다 제각각이어서 이들을 통틀어 인상주의라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니 각각의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이 아르장퇴유에 모여서 어느 한 가지의 통합된 경향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그곳 풍경만큼이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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