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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공심돈과 정약용

 

 

 

정조는 수원 신읍(新邑)을 급하게 만들면서 정치적 반대를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축성을 계획하면서는 미리 준비하고자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정약용이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휴직을 하고 있어 그에게 수원화성의 설계를 맡긴다. 성곽설계를 맡은 다산은 31살로 경험이 적고 성곽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또한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에 중국 병서(兵書)들을 탐독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병서 중 가장 많이 참조한 병서는 명나라 말기 1621년 모원의가 쓴 무비지(武備志)였다.

다산의 설계는 무비지 성제(城制)편에 나오는 시설들을 대부분 차용하였지만, 유독 공심돈(空心墩)만 배제하였다. 공심돈의 설명은 많은 분량이었는데 이를 배제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배제된 공심돈은 공사도중 3개나 설치된다.

정조가 공심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수원화성 준공 후인 정조 21년(1797) 1월 29일 서북공심돈 앞에서 신하들에게 “공심돈 제도는 우리나라 성제에서 최초의 것이다. 보고 싶은 신하들은 들어가 구경하라”며 자랑하였다. 하지만 동북공심돈 앞에서는 “불필요하게 힘을 써 기교를 부린 곳이다.”라고 폄하(貶下)하였다. 이를 ‘서북공심돈은 좋고 동북공심돈은 나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정조는 공심돈 자체를 불필요한 시설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조 21년(1797) 8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채재공이 “공심돈이 기이하고 교묘합니다.”라고 하니 정조는 “이는 다 도청(都廳, 현장 감독관) 이유경이 만든 것으로 모두 중요치 않은 곳에 힘을 들인 것이다.”라며 또 폄하한다.

공심돈을 이유경이 독단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심돈은 설계에 없던 시설로 상관인 조심태가 반대하고 있어 정조의 허락 없이는 추진될 수 없는 일이다. 이유경의 요구가 있었을 때 정조는 다산에게 의견을 구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1795년 7월부터 금정(충청도 홍주)찰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남공심돈은 그해 10월 18일에 준공되었으므로 공사 시작은 8월 말이나 9월 초로 다산이 서울에 없던 시기이다. 정조도 이유경이 생각한 것처럼 무비지를 보고 공심돈이 우수한 시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조도 우수하다고 허락한 공심돈이 왜 준공 후에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까. 이는 다산을 만나고 공심돈의 실체에 대해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금정찰방에서 돌아온 다산과 정조의 대화에서 들어보자. 정조는 “그대가 설계하지 않았던 우수한 공심돈을 추가하여 더 우수한 화성이 될 것이다.” 이에 다산은 “소신이 공심돈을 배제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다산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공심돈은 일종의 포루(砲樓)와 유사한 구조로 내부가 빈 허심돈(虛心墩)이다.

두 시설의 차이는 허심(虛心)이 있는 위치로 공심돈은 적대(敵臺) 즉, 성곽 성상로(城上路)의 상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에 포루는 치성(雉城) 즉, 성상로의 하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공격대상을 구분하면, 공심돈은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시설이고 포루는 근접한 적을 공격하는 시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두 시설에서 사용하는 주요 무기는 불랑기포(佛狼機砲)와 백자총(百子銃)으로 유효사거리가 매우 길어 높이 차이에서 오는 사거리 변화는 미미하다. 이처럼 무기의 사거리가 발달한 시기에 굳이 포대를 높게 만들면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되어 불리하다는 의견이었다.

정조와 이유경은 다산보다 한 수 아래였다. 창과 화살이 주요 무기인 고대에는 성곽은 높아야 하나 대포(大砲)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는 중세 이후는 성벽이 높을 경우 오히려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낮아진다. 공심돈을 살펴보면서 다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지만, 아름다운 공심돈이 없는 수원화성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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