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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발코니의 시간

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의 울림이 크다. 시로 잘 살려낸 덕분일 것이다.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기는 고인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도 그저 웃을 뿐이다. 이 장례법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던 아버지와 같기 때문이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이라고,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하면서 웃기만 하셨던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생은 결국 난간에 기대어 서다가 추락하는 일로 마감이 될 텐데, 그 마지막 순간에 ‘평온한 경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준 것처럼 나도 자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해 저무는 발코니’에 나가 세상을 보는데 ‘이까짓 두려움쯤이야’라는 말을 뱉을 수가 없다. 언제쯤 내성이 생길까. 아버지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이종섶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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