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여기는 詩 쓸 거 많다
[삶의 여백]여기는 詩 쓸 거 많다
  • 경기신문
  • 승인 2018.08.0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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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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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분수원문학시조분과위원장
진순분수원문학시조분과위원장

 

한 여름에 들어서면서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무더운 날에도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농작물을 가꾸어야 한다.

어머니는 수인선 전철이 들어서면서 오래도록 살았던 고향집이 없어져 아파트에 사시다가 전북 고창에 땅을 마련하시고 집을 지으셨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공기 좋고 땅이 좋아 내려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내 땅에서 농사짓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기에 그 꿈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해에 농사 지신 것을 골고루 택배로 부쳐주셨다. 옥수수부터 풋고추, 블루베리, 고구마, 콩, 김장거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성의 증표를 보내주셨다. 전원생활을 누리기엔 너무 땅 덩어리가 커서 도리어 힘에 부치셨다. 또한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기껏해야 우리가 고창에 가는 날이 일 년에 몇 번 안 되었다. 수원에서 고창까지 자동차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3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어느 날 전화를 드리니 “날마다 예쁜 새 울음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몰라, 니가 들으면 참 좋을 텐데. 여긴 정말 시 쓸 거 많다. 어서 오너라!” 하셨다. 이름 모를 새들의 맑은 울음소리를 들으시면서 딸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시도 잘 쓰리라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남도 땅 고창으로 전원생활 떠나신 날/ 먼 시골 노모 생각에 눈시울 붉어질 때/ 어머니, 큰딸 보듬어 꿈결로 오시었네// 풋고추 택배 상자 속에 따 넣으신 단감 몇 개/ 마음에 앉혀놓고 그림인 듯 바라보면/ 한 번도 허리 펴지 못한 우직한 삶 보였네// 산수 좋고 공기 맑아 지내기 좋다는 곳/ 날마다 예쁜 새들 청량하게 운다는데/ “큰애야, 어서 오너라 여기는 詩 쓸 거 많다” -진순분, <詩 쓸 거 많다>, 전문

그때는 새벽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그 이름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드는 존재인데, 오랜 세월 가까운 곳에 사시다가 어느 날 문득 멀리 전라도 시골로 이사하셨으니 꿈속에서도 그리웠다. 어머니는 마흔 여섯에 혼자되어 한평생 피땀 흘리며 소처럼 우직하게 자식들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큰애야, 어서 오너라 여기는 詩 쓸 거 많다”의 詩句는 처음 객지생활이 힘든 와중에도, 시 쓰는 딸에게 시골에는 글감이 많으니 어서 와서 詩想을 많이 얻어가라고 딸의 시 쓰기까지 걱정하신 것이다.

자라면서 가끔 시무룩할 때면 항상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넌 성탄절 밤에 태어나서 귀하대, 잘 될 거야! 뭐든 복이 있겠지” 하시며 희망을 주셨다.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8살의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알려지자, 12살이 많은 오빠 허봉은 알고 지내던 당시(唐詩)의 대가 이달(李達)을 선생으로 모셔온다. 시집간 동생이 시작(詩作)에 게으를까 새로 나온 두보(杜甫)의 시 해설서를 보내며 “두보의 명성이 내 누이에게서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또 임금이 하사한 귀한 붓을 보내며 “가을 규방에서 풍경들과 놀아보라”고 하며 난설헌이 시인으로 성장한 데는 오빠 허봉의 역할이 컸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위해 그냥 좋게 하신 말씀이란 걸 뒤늦게 알았지만, 그 말씀이 나에게 희망이 되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감성을 가장 많이 닮은 큰 딸이 나이 듦에 따라 어머니도 늙으셨다. 그동안 고창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접고 다시 경기도 화성 궁평항 근처에 새 터를 잡고 집을 지으셨다. 엊그제 갔더니 어머니가 텃밭에서 농사 지신 푸성귀를 싸주시며 “여기도 시 쓸 거 많다”고 하셨다. 꿩들이 내려와 ‘꿩꿩’ 울고 제비가 봄부터 처마 끝에 새끼를 두 번이나 쳤다고 한다.

방울토마토, 오이, 호박, 가지, 흰 양파, 자색 양파, 참나물, 곰취 등. 하나씩 꺼내 먹을 때 마다 어머니의 땀방울을 생각한다. 이 무더위에도 어머니는 틈틈이 자식 돌보듯 농사를 짓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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