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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드가의 차가운 시선

 

1868년 작 <관람석 앞의 경주마>이다. 늦은 오후의 하얀 하늘빛이 눈부시다. 그 아래에 있노라면 그 무엇도 들키지 않고 가릴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꽉 찬 해는 기울기 마련이고 날도 저물테지만, 견고함을 견지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워낙 예리하기에 어둠은 쉬이 승낙되지 않을 것만 같다. 화면은 작가에 의해 잘려진 어떤 시점과도 같고 그 안에서 대상들은 하얀 대낮에 벌거벗겨진 존재와도 같다. 언젠가 드가는 작품을 그리는 일이란 강간행위와도 같다 했다 했던가. 그의 작품 속에서 대상들은 육체와 감정을 온전히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완벽한 구성에 동원된, 거세된 재료들에 불과하다. 그러한 연유로 드가는 차갑고 냉혹한 예술가라는 평을 듣곤 한다. 하지만 나 자신만큼은 드가가 냉혹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 정확한 시선 속에서 일종의 위로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기에, 오랫동안 드가를 흠모해왔던 연유다.

경마장의 초원도 경마장 주변의 건물도 햇빛을 받아 노란 빛을 띠고 있다. 경마장에는 말을 탄 기수들이 몇몇 모여 있다. 경마장의 풍경은 에드가 드가가 즐겨 그리던 주제였다. 그는 말이 생명력을 담뿍 담고 있는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 구불구불하고 가는 다리는 기묘하게 땅을 딛고 서있고, 궁둥이와 목 주변의 탄탄한 근육은 말들이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향할 것만 같이 보이게 한다. 말은 드가의 뛰어난 데생 능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대상이기도 했다. 반면 기수들은 대부분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나 자세한 얼굴 묘사들이 생략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해 보인다. 경마장을 그린 드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조끼가 알록달록한 색채를 지니지 않았다면 기수들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했을 것이다. 동물의 털이 지닌 진갈색과 황토색 그리고 기수들이 입고 있는 원색의 조끼들은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허나 그 무엇 하나도 작품의 중심에서 독보적으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대상들의 탁월한 배치와 색감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지난 번 글에서 인상주의를 연구하던 르누아르가 갑자기 고전주의로 발길을 돌렸던 이야기를 소개했었다.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인상주의 전시에도 꾸준히 참여를 해왔지만, 애당초 변덕스러운 햇빛과 대기가 연출하는 찰나의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풍경화 자체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인상주의 화가들과 공통 지점을 찾자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일까. 그는 줄곧 고전주의를 연구했고, 앵그르를 추종했었다. 젊은 시절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을 많이 연습해야 한다는 앵그르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습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드가의 작품 속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앵그르가 그렸던 인물의 모습이 겹쳐지곤 한다. 드가는 습작을 위해 앵그르의 작품 여러 점을 소장했었다. 저 유명한 앵그르의 <목욕하는 여자> 뒷모습이 경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는 기수들에게서, 그가 수없이 그렸던 무희들과 여인들에게서 얼핏 얼핏 나타나는 것이 순전히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발레리나들은 드가가 많이 그렸던 또 하나의 주제였다. 주로 연습실에서 몸을 풀고 있거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타이즈를 신은 무희들의 탄탄한 다리 근육이며, 꽉 쪼인 수트 안쪽으로 보이는 등의 굴곡 그리고 무대 뒤에서 몸을 풀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포즈까지 그는 정말 정확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취하고 있는 생동감 있는 포즈 위로 하늘거리고 있는 발레 스커트가 더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드가는 말 탄 기수들을 대하듯 발레리나들도 대한다. 호감이나 불쾌감 같은 감정을 배제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며 최대한 정확하게 그렸다. 하지만 여러 명의 무희들이 이루고 있는 구도, 그리고 순간을 포착해낸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인해 연습실 안의 풍경은 생동감으로 충만해지고, 덕분에 발레라는 장르가 지닌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살아나고 있다. 대상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며 견고한 그 무엇을 꿰뚫어 보는 드가였기에,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본질이 담겨 있다. 대상을 차갑게 대하고 때론 무관심하게 대하는 듯 보여도, 실은 대상을 향한 애정을 최대한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가장 속 깊은 애정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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