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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칼럼]다시 어린아이 되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매일의 나날이 자연의 경건함으로/ 지속되기를 소망하노라.” -윌리엄 워즈워드 「내 가슴은 뛰노라」

며칠 전 한 초등학교에서 ‘효율적인 책읽기’라는 주제로 학부모들을 위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보통신기술혁명이라 부르는 차세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책읽기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의성을 고려해 특강 제목을 ‘4차 산업혁명시대의 창의적 책읽기’로 정해놓고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르면서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연이어 떠올랐다. 그렇다. 인간을 아무리 다양하게 정의해도 역시 ‘놀이하는 인간’이 진짜 인간이지, 혼잣말을 하며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인간은 지적·정서적 존재이다. 흔히 서양은 지성을 중시하고 동양은 감성을 중시한다고 하나, 실은 동서양의 현자들은 모두 지적·정서적 균형을 이상적 자아의 완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이상적 자아를 창의적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낙타의 단계에서 출발해 사자의 단계를 거쳐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르러 최종적 자아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낙타의 단계란 자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경에 순응하는 단계이고, 사자의 단계란 일체의 인습이나 관습에 저항하여 의지적 삶을 사는 단계이며, 어린아이의 단계란 순응과 저항까지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창의적 단계라 할 수 있다.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는 어떤 목적이나 의식 없이 놀이 그 자체를 즐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어린아이의 단계’는 학문의 최고의 경지를 즐거움으로 보아,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고 한 공자의 ‘즐기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동서양의 현자들의 궁극이 지성과 감성의 한계를 넘어선 즐거움이라는 절대순수에 있고 지혜(호모 사피엔스)의 궁극이 놀이(호모 루덴스)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지만 그 궁극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지혜의 아이러니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윌리엄 워즈워드 역시 무지개를 보고 뛰는 가슴을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무지개 보노라면/ 내 가슴은 뛰노라./ 어린 시절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며, 노년이 되어도 그러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나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매일의 나날이 자연의 경건함으로/ 지속되기를 소망하노라.”

어른이 되어서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뛴다는 것은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4차 산업혁명시대에 중요한 것은 단지 혁신적인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순수를 잃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읽기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어 인습의 두꺼운 껍질을 깨버리고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나와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창의적 책읽기가 아니겠는가? 이 무더운 여름, 우리 모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어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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