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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낮은 자의 경전

낮은 자의 경전

/신혜정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흐름의 끝이 어딘 줄 모르고 속도를 탓했던가요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의 자국이 남았습니다

자국을 없애는 일이 그저 쉬운 일이라면 계속 기꺼이 흘러갔을까요

고이면 안 되는 일이 숙명이었듯

잠깐 머문 당신이 남긴 자국, 아무도 모르게 감추는 나는

흘러가는 구름이고, 눈이고, 우박이고, 서리고, 이슬이고…… 대지를 덥히는 태양입니다

내가 아들을 낳고,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아들을 낳고……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이 태어날 때마다, 나는 낮아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남긴 자국을 하나씩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이 깊었습니다

- ‘여전히 음악처럼 흐르는’(2018) 수록

 

 

 

 

‘낮은 자의 경전’이란 제목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되는 핵심 이미지다. 통상 ‘경전’이란 공동체의 사유와 무의식, 윤리가 집중된 문장의 더미지만, 여기서의 ‘경전’은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향과 높이, 감각적 무게와 밀도를 압축한다. 그는 ‘물-이미지’를 통해 이 치열하고도 경이로운 삶을 발견하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물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 흐름의 끝도 모른다. 물은 중력에 이끌리며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자국이 패이고 웅덩이에 잠깐 고였다가도 야트막한 둑이 무너지면 다시 흐른다. 물에는 온갖 사물이 서려 있다. 구름, 눈, 우박, 서리, 이슬은 물론이고 태양의 집요한 움켜쥠도 있다. 시인은 물-이미지를 생명의 잉태로도 변용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낮아졌습니다’라는, 일관된 윤리적 자세다. 그것은 ‘내가 남긴 자국을 하나씩 지우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물은 마침내 ‘깊은 강’에 다다른다. 바다에 닿기 직전이다.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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