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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낙조에 들다

 

 

 

낙조에 들다

/한석호

들길 따라

쑥부쟁이 한나절 지는

들녘을 걷는다

가슴 풀어헤친 듯 걸려 있는

저 그림 나를 붙들고

먼먼 옛적의

연필 자국 선명한 그림엽서

바람에 떤다

점점이 타들어 가는

물오리 한 떼

해는

목선이 발갛도록 울고 있다

-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며, 손끝에 스며드는 바람의 온도를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시선에 들어오는 온갖 대상들의 목소리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들길에 버려진 자갈 한 알도, 햇볕의 스펙트럼에 미묘하게 색이 변하고, 다른 자갈에 걸친 미세한 기울기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걷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사태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며,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기록하는 자이다. ‘걷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물과 대화를 하는 신비한 경험이다. 그는 들길을 따라 걷는다. 무정형의 영혼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능선을 넘어온다. 쑥부쟁이가 드문드문 솟아 있는데, 끝도 없이 이어지며 먼 능선까지 달려가고 있다. 한나절을, 태양이 수직으로 솟아 사물의 그림자를 잘라내는 시간부터, 붉은 광휘가 숲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 ‘시간’까지 그는 한나절이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절’을 걷는다. 걸으면서 들녘을 휘감는 바람과, 바람의 어깨에 놓인 도처의 냄새를 맡는다. 걸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모든 계절은 한꺼번에 타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아주 길고 넓게 펼쳐지며 스며드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풀어헤친 듯 걸려 있는’ 그림처럼 단호하지만, 때로는 “나를 붙들고/ 먼먼 옛적의/ 연필 자국 선명한 그림엽서”와 같이 아련한 기억을 불러온다. 걸으면서 그는 들길의 풍경이 가볍게 출렁거리는 것을 본다. 마치 손끝에 닿은 강아지풀이 그 무게만큼 휘어지는 것처럼. 그때 ‘점점이 타들어가는/ 물오리 한 떼’가 허공을 휙 갈라버린다. 그 사선마다 선혈이 낭자하게 흩어진다. 황혼이 비껴가는 들길에서 “해는/ 목선이 발갛도록 울고 있’는 것이다. /시인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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