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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단풍잎들이 시월의 산에 그린 점묘화

화폭마다 열 달의 이야기가 가득 담겼다

옹이 속엔 지난 겨울 눈 냄새가

꽃 진 자리마다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밤톨에는 여름 볕의 따가움이

나는 가만히 아내의 배에 귀 기울인다

 

 

 

 

당신이 걸음을 멈췄을 때, 나는 귓속에 가득 이파리들이 몸을 비벼대는 소리가 들렸다. 단풍이 가득 펼쳐진 능선을 지나 여기까지 늦은 바람을 몰고 가을이 온 것이다. 그 눈부시고 사소한 길에서 ‘단풍잎들이 시월의 산에 그린 점묘화’처럼 당신의 얼굴은 밝고 수줍고 멀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깊은 화폭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시가 오는 분명한 방식이다. 가령, 따뜻한 차 한 모금이 혀끝에서 시작해 몸 전체를 휘감아 돌고 다시 혀끝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당신’이란 문장의 처음이자 끝이며 행간 속으로 스며드는 달빛이다. 내가 당신의 얼굴에서 밝고 수줍으며 먼 단풍을 본 것은 생활이 그만큼 가깝고 차가우며 아련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화폭에서 ‘열 달의 이야기’를, 생명과 같은 강렬한 시의 잉태를 그리고 그 문장들의 사계(四季)에 내재한 시선과 냄새, 미각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걸음을 멈추고 길섶에 뿌리 내린 작은 나무들을 보았다. 새끼손가락만한 가지들이 불규칙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옹이마다 지난 겨울의 묵은눈 냄새가 흘러나왔다. 가끔 꽃이 진 자리에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소란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햇볕이 흰 빨래처럼 넓게 펄럭거리는 오후의 아주 사소한 풍경이다. 너무나 사소해서 눈물겨운 삶의 ‘장소’들이다. 어디선가 툭, 아직 여물지 못한 밤이 따갑게 떨어진다. 나는 당신의 밝고 수줍으며 먼 표정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의 음계를 하나씩 짚어낸다. 시인도 그러했으리라. 아내의 부드러운 살결에 얼굴을 묻고, 시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꼈을 것이다.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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