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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松시선]수원의 유래와 화성시

 

 

 

오늘날, 수원시는 인구 120만의 대도시로 울산 광역시보다도 인구가 많아 기초지방자치단체중 인구가 가장 많다. 또한 경기도청 소재지로 인구가 수도권 도시 중 인천광역시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유동인구가 많아서인지 10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임에도 수원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수원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었다고 전한다. 모수국의 ‘모(牟)’는 오늘날 ‘물’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어서, 고구려 때는 이에 근거하여 이곳을 ‘매홀’이라 하였는데 ‘買忽’의 ‘買’는 고구려 당시 ‘물(水)’을 한자로 빌려 쓴 것이고, ‘忽’은 ‘골(谷)’이란 고구려말을 漢字로 借字(빌려 쓴 글자)한 것이다. 그러니까 ‘물골’이란 지명이 오늘날 수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원시는 정부수립후 1949년 수원군에서 수원읍이 분리되면서 현재 행정구역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수원읍이 속해있던 본래의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서부터 오해의 싹이 트게 되었다.

예로부터 수원의 행정중심지는 오늘의 수원시가 아니라 수원고읍성이었다. 오랫동안 수원의 행정중심지였던 수원고읍성은 고려시대 이래 조선 중기까지 지금 융건릉이 있는 화성시 화산동에 있었다. 수원읍성의 형태는 화성시 융건릉 앞 효행로에서 배양초등학교로 들어서는 융건로 교차부분부터 건릉 북쪽의 산 정상부까지 산능선을 타고 뻗어 있어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수원고읍성은 수원화성을 수원신읍성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수원화성 이전까지는 그저 수원읍성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선조 정조대왕은 1789년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이곳 수원고읍성으로 이장하면서 수원고읍성은 그 역할이 끝났고, 이곳 북쪽 팔달산을 배산으로 새로 축성한 수원화성(신읍치)에 수원부를 이전하여 현재의 수원화성이 옛수원부의 행정적 기능을 이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1872년의 수원부 지도를 보면, 수원부는 북으로 광주와 안산을 경계로 하고 동으로는 용인, 남쪽으로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는 아산만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닌 지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광복 이후, 수원군에서 수원시가 분리되었고, 본디 고읍성이 있던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그 결과로 정조대왕이 축성한 신읍지인 화성이 수원시가 되어 광활한 영역을 지닌 수원군의 명칭을 이어받게 되었고, 본래 수원군은 엉뚱하게도 수원화성에서 그 명칭을 끌어와 넓은 땅을 가졌으면서도 근거도 없는 화성군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시가 화성군 대신 종전의 수원군의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별 생각없이 행정관리들이 지역분할로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명한 탓으로 과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행정중심지가 오늘날 화성시에 있고, 오늘의 화성시엔 화성(華城)이 없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어 이 두 지역이 서로 다른 별개의 지역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수원화성은 일제의 조선 문화 훼손정책으로 축성 당시의 이름을 잃고 수원성으로 불리다가, 훼손된 행궁을 복구하며 수원성이 제 모습을 찾으면서 화성이란 본연의 이름도 되찾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지정된 바 있다.

수원시와 화성시는 별개의 독립된 도시가 아니라, 뿌리가 같은 지역으로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는 지역이다. 수원시에 있는 수원화성은 화성시의 융건릉 없이 이해할 수 없으며, 화성시는 수원 화성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역은 행정구역만 다를 뿐, 예로부터 현재까지 근본이 같은 하나의 뿌리이자 동일 문화생활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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