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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풍성함도 때로는 서글프다

 

하늘은 이른 시간부터 연회색 파스텔을 칠하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잠시 머물러 사진으로 담고 싶지만 마음이 급하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존경하는 선생님 안부를 전해 듣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어렵던 문협에서 마음으로 많이 의지하고 가르침을 받던 선생님께서 병원에 계시다는 소식은 마음 한쪽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교단에서 평생을 바치시고 전원생활을 위해 제자의 주선으로 시골에 오가피 밭이 달린 조그만 집을 장만하셔서 꽃도 키우시고 좋아하는 동물을 기르시며 노후를 자연 속에서 사시고자 솔안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시골 마을로 오셨다.

제자들이 있어 낯설지 않으셨고 또 선생님 내외분께서 워낙 인품이 좋으셔서 금방 적응하시고 동네에서 존경 받으시며 재미있게 지내셨다. 봄이면 냉이를 캐어 국을 끓여도 사진을 올리시고 쑥을 뜯으시며 행복해하셨다. 시골엔 들에 반찬이 가득하다하고 하시며 소녀처럼 좋아하시며 시골살이의 소회를 글로 올리시고 사진을 보내주시며 틈틈이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황반변성이라는 안과 질환이 발견되어 서울 집에 머무시며 치료에 전념하시게 되어 자연히 발길이 멀어지셨다. 그래도 이쪽으로 걸음하실 때면 꼭 찾아주시며 정을 주시던 선생님께 전화도 점점 뜸해졌다.

올 해도 유난히 더운 여름 어찌 지내시나 안부를 여쭈었는데 무슨 일인지 답이 없으셨다. 자세히 보니 확인도 안 하고 계셔서 전화를 바꾸셨거니 혼자 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듣게 된 소식은 선생님께서 사람도 몰라보신다는 너무 놀라운 소식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문병을 간다거나 절대 아는 체를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일단 솔안으로 방문을 했다. 선생님께서 가꾸시던 꽃은 풀 속에 묻히고 키가 큰 화초는 넘어진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쓰다듬으시던 고양이도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재빨리 숨는다. 개들이 짖고 차 소리가 들리면 마당 가득 예쁘게 자라는 화초처럼 웃는 얼굴로 나오시던 선생님께서 안 계시니 잡초만 무성하다. 가지가 늘어지게 달린 대추나무 곁에 하얀 코스모스가 청순한 얼굴로 앉아있다. 개들은 여전히 주인 없는 집을 지키며 낯선 사람을 향해 목이 터져라 짖는데 선생님은 안 계시다.

혹시 용태가 호전되어 솔안에 계시지는 않을까 했던 기대는 무너지고 가을이 익는 산골 집에서 보이는 논은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백일홍이 순박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포도의 단내가 스미는 길을 돌아 나오며 만나는 풍요로움이 함께 누릴 선생님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더 슬프게 한다.

늘 선생님을 부러워했고 닮고 싶어 했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삶이었고 슬하에 딸 셋을 두시어 큰 따님은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남편과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둘째도 알콩달콩 살고 있고 노모도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가셨고 얼마 전에 막내 따님도 짝을 지어 할 일을 다 하셨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언젠가 햇살 바로 드는 툇마루에서 선생님께서 손수 심어 가꾸신 복분자로 담그신 술이 익었다고 한 잔씩 주시던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선생님께서 우리를 못 알아보셔도 복분자주 익었다고 귀에 대고 말씀드리면 지금이라도 우리 곁으로 오실 것만 같다. 풍요로운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연세답지 않게 낭랑하신 목소리로 그간의 얘기를 들려 주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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