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삶의 여백]시월이 오는 소리

 

 

 

 

 

달이 바뀜은 세월이 흐르는 이치인 줄 알면서도 다음달은 더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다.

구월은 그다운 향기가 가득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는 달이기에 식물은 결실을 위해 몹시 바빴다. 사람도 생각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수확하려고 잠재된 생체 리듬이 움직였으리라. 단풍이 무르익는 시월은 사색에 잠겨 시간을 빼앗기지만, 구월은 그럴 여념이 없이 바쁘다. 한참 무더위에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이 지고’라는 구월이 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벌써 가고 있다. 고추잠자리가 마당을 배회하면 가을은 한껏 깊어가고, 한가위 보름달은 온 누리를 평화롭게 비추어 줄 터이다. 구월이 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전해온다.

곤충의 소리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한여름, 왕매미 소리는 멀리까지 귀를 따갑게 울려 더위를 안겨준다. 함석지붕에 자갈 구르는 듯하거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매미 소리는 삼복더위에 바람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여치 소리는 청량감이 있다. 약하면서도 길지 않은 노래는 산소처럼 맑고 시원하다. 여치의 노래는 구월이 왔음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구월 중순이 지나면 아침저녁으로 귀뚜라미가 화답한다. 귀뚜라미의 멜로디는 들렸다 잦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가슴에 파고든다. 귀뚜라미 소리는 서울 가서 비단 구두를 사서 오신다던 오빠가 소식도 없기에 소녀를 가슴 앓게 하고, 전쟁터에 나간 신랑이 그리워서 아스라한 지평선을 한없이 바라보는 새색시를 떠오르게 한다. 귀뚜라미가 경쟁하듯 사방에서 노래 부르면 구월이 다 가고 있음이다.

풀잎에 이슬 맺힌 청량한 아침의 하늘을 보았는가. V자로 떼를 지어 늘어선 기러기들이 남쪽을 향해 날개 젓는 모습은 장관이다. 기러기 떼는 서늘한 북쪽의 바람을 안고 오는 전령이다. 누가 부르거나 귀띔하지 않았는데도 때를 알고 잘도 찾아온다. 쓸쓸한 기운을 몰고 오는 것이다.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가느다란 꽃대가 바람에 일렁이며 흐느적거린다. 수줍음을 타는 색만 골라 봉오리에 달고서 바람 따라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길은 꿈속에서 꿈길 걷듯 아린 정감에 빠져들게 한다. 팔랑거리는 꽃잎은 초등학생의 가을 운동회를 연상시키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다. 예로부터 이때를 가리켜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이라 했다. 서산 위에 붉은 노을이 질 때, 어디인가로 흘러가는 풍선을 바라보노라면 자신도 정처 없이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발길 닫는 대로 목적 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스린다.

구월이 가는 소리에는 사색이 눈을 뜨고, 애절함이 되살아난다. 누군가에게서 온 편지봉투의 소인에서도 아득함을 읽는다. 봉투를 뜯지 않아도 풀벌레 소리에 잠 못 이룬다는 사연이 가득하리라는 짐작에서다. 이슬 젖은 박꽃이 시리도록 하얗다. 초가지붕 위에 박이 열리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개량된 지붕으로 하여 앉을 자리가 없어 고양이 앞에 도토리 신세로 벽돌담에 처량하게 매달려 있다. 멍석에서 빨간 고추가 익어 가는 해질녘, 동구 밖을 바라보며 군대에 간 막내아들로부터 행여 편지라도 오려나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노부부 모습이 아른거린다.

익어가는 벼에 참새는 신이 났다. 국화도 꽃잎을 열려고 준비 중이고, 알알이 여문 대추도 붉게 익어간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 없이 보냈던 구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미련 없이 보내야 할 일이다. 한 곳에 집착하면 미래가 없을 터, 찬란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집착을 떠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고 싶다.

시월이 서산 너머로부터 소슬바람을 안고 오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가득할 터이니 대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맞이해야겠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