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
/이현서
눈 내린다 춘삼월의 눈은
스쳐 간 인연의 기웃거림이다
먼 행성에서 돌아온
낯선 이름들이 눈보라로 날리고
어디선가 흘러와 스쳐갔을
내 삶의 붉은 무늬 속 단단한 그늘
미완의 악보처럼 누워 있다
바람이 물고기자리를 건너는 동안
텅 빈 겨울 숲을 해찰하던 구름은 이동 경로를 바꾸었다
위태로운 질문처럼 무수히 흩어지는 파문
영역을 넓힌 상처의 흔적마다
꿈의 살점들이 흘러내렸다
안간힘을 쓸수록 무너지는 중심
시퍼런 시간의 넝쿨이 뚝 끊어졌다
- 이현서 시집 ‘구름무늬 경첩을 열다’
어느 날 흘러나오는 것이 있다.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내 안에 무너지지 않게 묶어놓은 중심 같은 것이다. 시퍼렇게 접어 넣은 시간의 넝쿨이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바람도 구름도 날씨도 너에 대한 내 생각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란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의문은 위태로운 질문처럼 주어지고 파문은 무수히 흩어진다. 그리하여 가슴 속 품었던 꿈의 살점들이 흘러내리며 입게 되는 상처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기웃거린 인연으로 이동 경로를 바꾸어간다. 그러나 단단히 뭉쳐놓은 그늘처럼 내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그 미완의 악보들이 음들을 풀어헤치는 날들이 있다. 춘삼월 눈발이 날리듯 허공을 메우며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먼 기억 속에 묻어둔, 나를 텅 빈 겨울 숲으로 밀어 넣어 해찰하게 했던 순간들, 그 시간은 나를 좀 더 성숙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으니, 나를 뚫고 흘러나오는 것들은 이내 녹아 사라질 눈발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서정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