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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칼럼]창조적 에너지로서의 멜랑콜리

 

예술이란 무엇인가? 최근 예술가들의 기상천외한 기행과 추행이 마치 개성적인 예술적 행위나 특별한 교육방식인 양 스스로 합리화하는 경악스러운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럽고 고독한 내면적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John Keats)는 2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 감각적 이미저리가 뛰어난 많은 송시(Ode)를 썼다.

그 중 ‘우울에 부치는 송시’(Ode on Melancholy)에서 우울(멜랑콜리)은 고도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상태로 그려진다. 키츠의 세계에서 우울은 흔히 생각하듯 부정적인 병리 현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성취하기 위한 극도의 내면화 과정으로서 일종의 관조적 명상이다. 우울은 예술 창조를 위한 내적 에너지인 것이다.

우울은 영혼의 깨어있는 고통이자 창조적 에너지이므로 우울이 찾아올 때면 이를 회피하거나 망각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설령 슬픔일지라도 마음껏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허나 우울의 발작이/ 울고 있는 구름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때면/ … 그대 아침 장미를 바라보며 그대의 슬픔을 실컷 맛보라… 우울은 아름다움과 함께 산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존 키츠 ‘우울에 부치는 송시’ 일부

아름다움은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기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지연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명상할 수밖에 없다. 인간 역시 유한한 존재이지만 아침의 영롱한 이슬이 맺힌 장미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생명의 단명과 필멸을 즐길 수 있으리라.

키츠의 시세계에는 두 개의 상반되는 감정이 병존한다. 희열의 극치에서 고통을 느끼듯이 환희는 우울을 동반한다. “기쁨의 성전 바로 그 곳에/ 베일 쓴 우울은 최고의 성소를 가지고 있으니.” 진정한 예술 감정으로서의 환희와 쾌락에는 고통과 우울이 수반되는 법이니 고통과 우울이라는 내적 관조와 명상을 동반하지 않는 표피적 환희와 쾌락은 예술이 아닌 동물적 욕망에 불과하다.

일찍이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역시 창조적 에너지로서의 우울을 특징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16세기 독일 르네상스의 예술가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 1’은 매우 상징적이고도 알레고리컬하게 우울의 속성을 재현하고 있다.

명상과 관조의 표상으로서의 멜랑콜리아의 화신인 양 한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다. 바닥에는 대패, 톱, 망치 등 실용적인 도구들이 널려 있고 여인의 뒤에는 모래시계, 천칭, 마방진 등 과학적인 합리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걸려 있다. 중요한 것은 저 멀리 무지개처럼 빛나는 광휘 가운데 ‘멜랑콜리아’라는 글자가 보이고 사다리가 현상의 공간을 넘어선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조와 명상의 표상으로서의 ‘멜랑콜리아’가 지향하는 세계는 사다리가 상징하듯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이상적인 예술의 세계인 것이다. 내면적 관조 없이는 예술의 세계에 이를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멜랑콜리아’야말로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에너지이다.

예술의 이름으로 해괴한 기행이나 추행이 자행되는 차제에 진정 예술가다운 자세가 무엇인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처절하고 고독한 자기 명상이 선행되고 관조가 내면화될 때 진정 창조적인 예술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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