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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피카소와 브라크

 

 

 

피카소가 1907년 음산하고 광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했을 때 동료 브라크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며, 앞으로의 경향에 대한 대화를 그와 막 시작하고 있었다. 홍등 아래서 아프리카 탈을 쓰고 있거나 정면을 바라보며 뒤틀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의 조각난 신체는 뭔가 원시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브라크가 받은 인상은 그런 광적인 감흥이 아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이성적으로 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크는 ‘아비뇽의 처녀들’에 답례라도 하듯 ‘큰 누드’를 발표한다. 이 여인의 신체 역시 심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처럼 조각나 있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각진 바위 덩어리처럼 건장한 느낌을 주었다. 인체는 다각형의 이어진 면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까끌까끌하고 단단한 나무 혹은 돌처럼 채색이 되어 있었다. ‘아비뇽의 처녀’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만 피카소의 다분할, 다초점의 매우 강한 영향이 보였다.

피카소는 브라크의 작품에 매우 만족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려서 거의 매일 저녁 만나 그날의 작업을 나누곤 했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내적인 공유가 얼마나 깊었는지, 이 무렵 두 사람이 그린 작품들 중에는 어느 것이 피카소의 것이고, 어느 것이 브라크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들도 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의 천성과 기질이 거의 정반대였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피카소는 재기발랄하고 폭발적인 에너지의 소유자였던 반면에 브라크는 신중하고 차근차근했던 것이다. 오히려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렸었는지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년을 속 깊은 친구 사이로 지낸다.

지난 글에서 ‘아비뇽의 처녀’와 함께 이후 발표한 피카소의 ‘세 여인’이라는 작품에 대하여 잠깐 언급을 했었다. 이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들 보다 정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등장인물들의 신체도 훨씬 다부지게 표현되었다. 아프리카 가면을 연상시키는 얼굴선과 이목구비는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었지만, 조각난 파편들로 존재하는 대신, 견고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브라크의 누드에서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브라크가 막대한 영향력을 피카소에게 되돌려 주었다. 비평가들은 이 두 사람이 시작한 이 새로운 경향을 일컬어 ‘입체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입체주의’라는 말 자체는 피카소가 아닌 브라크가 처음 획득한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 등장한 경향에 대하여 항상 비평가는 비꼬는 말을 던지기 마련이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대하면 이상할 정도이다. 화가 마티스는 살롱에 출품된 브라크의 작품을 심사하면서 ‘입방체’로 이루어진 매우 기이한 그림이라고 비꼬았고, 평론가 루이 복셀은 ‘입방체’라는 단어를 주워 담아서 ‘입체주의’라는 말을 처음 고안해냈으며, 이를 브라크의 작품을 논하는 데 활용했다. 마티스가 입체주의의 영향력을 무시했던 건지 두려워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후 입체주의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퍼져 나갔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더욱 세분화되고 고도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피카소에 의해 그것은 가장 많이 잘 알려지게 된다.

피카소는 동시대의 핫한 경향을 빠르게 흡수했던 영리한 작가였으므로, 그의 포트폴리오는 변화무쌍한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도저히 한 사람의 손으로 완성된 작품들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기법과 형태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브라크와 함께했던 시절에 완성했던 작품들이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여느 작품과는 달리 안정적이고 견고하며 차분한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파격적이고 틀을 깨기 좋아했던 작가였다면 브라크는 건설적이고 건축적인 느낌을 선호했다. 두 사람의 완전히 다른 성향과 기호가 입체주의라는 위대한 경향을 탄생시켰다. 한 명의 거장이 또 다른 거장을 만나 그처럼 오랫동안 교유하며 작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여운을 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12년 브라크가 군입대를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제대를 하고 보니 브라크는 심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후였고, 피카소는 너무나 큰 스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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