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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강도(江都)와 고려왕릉

1232년 몽골군의 침입 하자 고려 왕실은 지금의 강화도 관창리 궁을 짓고 개경에서 피난와 39년간 머물렀다. 고려의 ‘강도(江都)’시대다. 당시 고려는 대몽 항쟁의 시련 속에서도 수도로서 개경 못지않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축조되었던 궁터와 왕릉은 고려의 왕실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강도엔 아픈 역사도 있다. 왕족과 지배 계급은 백성의 고통과 절망에는 아랑곳없이 궁궐에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를 꼬박꼬박 치르는등 그 호화로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엔 이런 기록도 있다. "여름 5월, 최이(崔怡)가 종실의 사공 이상과 재추들을 그의 집에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기악(伎樂)을 벌여 온갖 놀이를 하고, 팔방상(八坊廂)의 공인 1천 3백 50여 인이 모두 성장을 하고서 뜰에 들어와 음악을 연주하는데,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소리와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 비용이 거만(鉅萬)이나 되었다"

고려 왕실과 지배계급의 잔치는 이처럼 항상 음악과 춤을 곁들여 호화로운 것이었다. '처용무'나 '가면잡기' 등으로 여흥을 돋우었고, 그때마다 담 밖에는 잔치를 구경하려는 강화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만 20만 명이 넘고 전국 곳곳이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음에도 지배세력이 그렇게 화려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의 조세가 안전한 해로(海路), 즉 조운로(漕運路)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와서 라고 한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황룡사의 9층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타버렸다. 그러자 현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16년간에 걸쳐 다시 만들게 된다.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한 왕실의 고뇌가 역사로 남아있는 곳 또한 강도다.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인천시가 '강도(江都), 고려왕릉' 특별전을 오늘부터 12월 9일까지 시립박물관에서 연다고 한다. 모처럼 800여년전으로의 시간여행, 괜찮을듯 싶다.

/정준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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