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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큰별 신성일

1957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하던 신성일은 서울 청계천에서 호떡 장사를 했다. 그리고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 응모,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밝게 빛난 ‘큰별’의 등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1960년 신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출연 영화만 524편,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가 총 185편이었으니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따라서 항상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뉴스가 됐다. 특히 1964년 반항적인 주인공을 연기한 ‘맨발의 청춘’이 크게 성공하면서 ‘청춘 스타’로 대규모 팬덤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 영화로 연인이 된 배우 엄앵란과 1년만에 올린 결혼식은 장안의 화제였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천여 명이 몰려 할리우드 스타를 방불케 하는 인기를 확인하기도 했다.

명성 만큼이나 영화제 수상이력도 화려한 그는 2000년 3수(修)만에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배우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그는 영화와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이러한 공로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 되기도 했다.

배우로서 영화인으로서 한국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가 어제(4일) 81세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준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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