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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마티스의 ‘춤’과 ‘음악’

 

1910년 마티스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 두 점을 발표한다. 하나는 ‘춤’이라는 작품이고, 하나는 ‘음악’이라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짙푸른 초록풀밭 위에, 짙푸른 파랑을 배경에 두고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춤’이라는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원형으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다. 움직임이 유연하고 아름다워, 트램폴린을 딛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체조선수를 떠올린다. ‘음악’이라는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서거나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인물들이 파랑과 확연한 보색을 이루는 오렌지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다. 춤, 그리고 음악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배경에 초록색과 파란색만 있는 점, 인물들이 나체라는 점을 살펴봐도 작품이 뭔가 근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이제 정돈을 마친 화가로서의 자기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미술의 경향이 매우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던 이 무렵 다른 화가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마티스는 선배나 동료들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하고 습작했다. 인체를 다룬 부드러운 드로잉 선은 세잔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한동안 세잔이 사용한 구도를 열심히 탐색했고, 세잔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피카소에게도 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피카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아프리카 가면도, 처음엔 마티스가 먼저 관심을 가졌던 주제였다. 마티스로부터 세잔과 아프리카 가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피카소는 이 두 주제를 강한 화두로 터뜨려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함께 주창한 입체파에 대해서 그가 비판의 입장에 섰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마티스에게 아프리카 가면과 세잔이라는 주제는 그가 연구하고 있는 대상에서 일부만을 차지한다. 그는 한때 신인상주의 화가 시냐크로부터 점묘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 기법을 익히면서 색채 이론을 면밀하게 공부했을 것이다. 색에 관하여는 드가의 영향도 있었다. 마티스는 드가의 말년 작품 ‘머리 빗는 여인’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화면 전체가 붉은색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강렬한 느낌의 작품이다. 드가의 말년, 손상된 시력과 쇠해진 기력으로 드로잉은 뭉툭해졌고 색은 더 강렬해졌다. 이 작품에서 쓰인 붉은 색감과 인물들의 형태는 마티스의 ‘붉은 실내’를 떠올리게 한다.

‘춤’과 ‘음악’에서 나타난 이국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은 고갱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후 작품에서도 아라베스크 풍의 문양과 의상을 모티브로 즐겨 사용했다. ‘나비파’라는 인상주의의 경향을 완전히 부정하며 등장했던 젊은 화가 그룹들의 영향도 있었다. 나비파는 사실에 근거한 색채의 사용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오로지 인간의 직관에 의존한 색채의 구상을 주장한다. ‘춤’, ‘음악’에서 쓰인 강렬한 색채도 사실에 근거한 색이라기보다 화가의 직관적인 색채에 가깝다.

피카소나 마티스나 허기진 예술가이긴 마찬가지였다. 피카소가 특정 주제를 크게 터뜨려 화두를 던지는 작품을 발표했다면, 마티스는 차근차근 과정을 밟는 스타일이었다. 현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골고루 흡수했고, 천천히 소화를 시켰다.

초기 작품에서는 여러 기법들을 크게 오고가는 행보를 보이지만, 일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뒤에는 어떤 경향을 향해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그러한 면에서 ‘춤’과 ‘음악’은 마티스의 활동에 정점을 찍었던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작품이 주는 분명한 색채와 분위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마티스는 이즈음 자신의 노선을 확실하게 정했던 것이다.

그가 이후 화가로서 스타일을 확 바꿔야 했던 시기는 딱 한번, 류마티스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붓을 들 수가 없어 색종이 오리기로 작업을 대체해야 했을 때 뿐이었다. 대중들은 피카소와 마티스를 라이벌 구도에 놓고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이 둘이 세기의 라이벌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항간에서는 마티스가 피카소와는 다른 노선을 취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마티스의 찬찬한 행보를 살펴본다면, 그건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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