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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내일을 향해

 

추수를 끝낸 들판은 거대한 알들로 꽉 차 있다. 하얗거나 검은 옷을 입고서 들판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둥치들, 한때 그것들을 신의 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수많은 알이 들판을 점거하고 있는 저 속엔 지난 한 해의 사연들이 빼곡하게 발효되고 있다.

지독한 폭염과 가뭄 그리고 유난히 극성이던 병충해를 견디고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에 가을 태풍이 몰아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확을 앞둔 벼가 쓰러져 깔리면서 나락의 품질도 떨어지고 수확도 많이 줄어든다.

관리가 잘 된 논은 잡풀 하나 없이 황금빛 나락만 출렁이고 그렇지 못한 논은 벼이삭보다 훤칠하게 자란 피가 통통하게 여물어가기도 했다.

그 사이로 메뚜기가 뛰어다니고 잠자리가 짝짓기를 하기도 했고 목이 긴 백로가 먹을 것을 찾아 논바닥을 헤집기도 했던 지난 계절의 일들이 저 알 속에 빼곡하게 저장되어 있다.

볍씨를 발아시켜 쌀이 되는 과정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볍씨를 발아시키는 일을 가장 중요시했다. 가을에 나락을 털면 가장 좋은 것으로 볍씨를 따로 보관했고 4월 중순경 볍씨를 발아시켰다. 볍씨 소독을 먼저하고 깨끗한 물을 길어와 발아시키는데 정성을 들이곤 했다. 지금은 공동으로 볍씨를 발아시키기도 하고 모를 주문해서 심기도 하지만 대농이던 아버지는 손수 모든 과정을 직접 하셨다.

무엇이든 싹이 튼실해야 수확이 좋다며 농사의 기본은 부지런하고 정직해야 하늘도 보살핀다고 하셨다. 논에 못자리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비닐을 쳤다 내리면서 발아된 나락이 성장하기 좋은 온도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모가 한 뼘쯤 자라면 모내기를 시작했고 들밥을 내가면 논의 한켠에 있는 큰 바위에 먼저 밥과 정화수를 놓고 한해 농사가 잘되도록 도와달라고 기원하며 정성을 들였다.

모내기가 끝나면 조석으로 물꼬를 살피고 병충해를 살폈다. 아버지의 논에는 잡풀이 없었고 논두렁은 늘 말끔했다. 벼가 너무 잘 자라면 가을 태풍에 쓰러져 피해가 생긴다고 비료 주는 양을 엄격히 조절하며 벼의 성장을 살폈고 농사의 반은 하늘이 지어주는 거라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들판에서 나는 나락 냄새를 제일 좋아하던 아버지는 일소를 귀히 여기고 살뜰히 보살폈다. 소를 잘 보살펴야 한 해 농사가 수월하다며 소의 울음소리로 소의 건강상태를 확인했고 소가 좋아하는 것들을 챙기곤 하셨다.

타작을 끝낸 볏단을 비가 맞지 않도록 차곡차곡 쌓아 겨우내 소의 사료로 썼다. 탈곡기가 나락을 털어내는 동안 아버지는 산더미처럼 쌓인 볏단을 집을 만들 듯이 쌓아올렸다. 아버지가 쌓은 볏짚은 봄이 끝나도록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이야 탈곡을 하고나면 기계로 짚을 말아 비닐을 씌우지만 예전에는 볏짚을 쌓아 보관하는 일도 큰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들판에 널려있는 볏짚을 보면서 신의 알 일거라는 상상을 하는 것은 나의 뿌리는 농경에 있고 농경은 하늘이 도와야 제대로 농사가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마지막 달력이다. 누군가에겐 열심히 살아 후회와 아쉬움 없는 한 해가 되었을 거고 더러는 이런저런 이유로 미련이 남는 해였을 수도 있다. 들판의 볏짚이 한해의 과정을 품고 발효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쓸데없는 시간이란 없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순간순간은 최선을 다했을 시간들이다. 저 볏짚을 먹고 소가 살찌고 들판은 내년을 기약하듯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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