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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피카소의 병든 연인

 

 

 

1914년에 피카소가 그린 병든 그의 연인의 모습이다. ‘암체어에 앉아 있는 여인’의 주인공인 에바 구엘은 피카소의 두 번째 여인이자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으로서, 천성적으로 왜소하고 나약했다. 그녀는 피카소를 만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병이 나기 시작했고, 그 후로 몇 달 뒤에는 너무나 몸이 쇠약해져서 거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커다란 암체어에 앉아있는 여인의 신체는 부분 부분으로 조각나 있어, 곧 그녀에게 들이닥쳐서 그녀를 이처럼 산산조각 내버릴 죽음의 존재가 캔버스에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이 시기 피카소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 형체를 아예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잘하게 조각낸 경우가 많았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실험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체어에 앉아 있는 여인’에서는 꽤나 또렷한 여러 형체들이 나타난다. 그녀를 커다랗게 감싸고 있는 암체어의 존재도 그렇고,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 가슴도 모두 충분히 식별이 가능하다.

피카소는 대상의 형태를 쪼개는 실험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가 다시 형체를 재조합하는 노선을 걷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얼마 전부터 다시 교류를 하기 시작한 마티스의 영향이 컸다. 마티스는 입체주의가 지닌 가능성을 일부 인정하는 한편, 마구잡이로 형태를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에는 반기를 들었으며, 입체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해 그것을 피카소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피카소 역시 마티스의 조언대로 대상의 실체와 질감을 작품에 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에바는 곧 온몸을 갈라야 하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서의 큰 고통을 암시라도 하듯 두 가슴엔 못이 막혀 있고, 여성성을 상징하는 두 유방은 못에 걸쳐져서 길게 늘어져 있다. 여인의 조각난 신체는 따뜻한 질감과 색상의 원목처럼 표현되어 있어 피카소가 그녀에게서 얻었던 심리적 안정감 역시 느낄 수가 있다. 비록 그녀의 신체는 조각나 있지만, 그녀의 몸이 지닌 여성성, 피카소에게 전했던 따스함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가슴 아래쪽으로는 유난히 눈에 띄는 구불구불한 하얀 형체가 보인다. 속치마나 레이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부분은 그녀가 지닌 또 다른 여성성을 의미했다. 비록 병석에 누워있을지언정 여전히 그녀는 피카소에게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아름다움은 이제 꺼져갈 위기에 놓여있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그녀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 굳건히 했을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는 이 작품을 병마로부터 에바를 보호해줄 부적처럼 여겼었다고 한다.

피카소와 에바의 슬픈 사연에 젖어, 잠시 피카소가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잊을 뻔 했다. 그녀는 에바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잠깐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나쁜 남자였다. 끔찍한 바람둥이였다는 사실 말고도, 피카소가 지닌 나쁜 면이 또 있었다. 바로 연인의 병과 죽음마저 작품의 소재로 갈취해버리는 이기적인 작가였다는 점이다. 이 천재화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세상에 남길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허겁지겁 흡수해버릴 수 있는 허기진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연인에게 덮친 병마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슬픔마저도 이 천재화가는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비정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세계를 폭력의 수렁으로 빠뜨렸던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대를 모면한데 대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이 지닌 참혹함을 담은 대작을 발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에바를 향한 그의 진실한 마음을 누구라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는 에바가 죽자, 한동안 넋이 나가 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잠깐 그의 곁에 머물다가 병들어 죽은 에바, 그리고 에바로 인해 피카소가 크게 슬퍼했다는 사연은 이후에 완성된 피카소의 작품을 읽는데 참고할 만한 중요한 한 수가 된다. 입체주의는 단지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 대상을 비정하게 쪼개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비통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경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암체어에 앉아 있는 여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비록 형태가 좀 희한하고 아리송하지만 작가 여인을 향해 지녔던 그 감성을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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