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영화로 보는 세상]‘한국영화 100년’이라고?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몇 곳에서 올해를 ‘한국영화 100년’으로 보고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한국영화’와 ‘100년’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까? ‘한국영화’라는 말은 단순하지만 그 개념을 꼼꼼하게 따지자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일제강점기 36년은 국체(國體)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것은 1897년 10월 12일. 그러나 한일협상조약(을사조약·1905)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했다. 힘없는 새나라는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상실한 것이다. 국권을 빼앗긴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침탈이 부당한 행위이며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그 뜻을 받아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한 최고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대한제국 선포로 사라진 ‘조선’이란 국호를 다시 꺼낸 것이니,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긴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존재마저 부정당한 셈이다.

확인 가능한 기록상 한반도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1년. 미국인 여행가 엘리어스 버튼 홈스는 대한제국 시절의 한국을 여행하던 중에 황실에 영화를 소개하고, 서울 시내 곳곳을 촬영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때는 누구나 관람 가능한 대중상영과는 달리 한정된 특별 관객을 위한 비공개 상영이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공개 상영은 1903년 6월, 서울의 전차 공사를 미국인 헨리 콜브란이 동대문 근처에 있던 발전소 겸 전차 차고(현재 서울 종로5가 메리오트호텔 자리) 빈터에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영화를 보여준 것이 처음이었다. 입장료는 10전을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싼 요금이었다. 그래도 호기심에 끌린 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소개된 영화들은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등에서 촬영한 1∼2 분짜리 실사(實寫·사물이나 풍경을 편집없이 촬영한 영상)였는데, 사진이 움직이는 것을 신기한 요술처럼 여겼다.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들만 보다가 우리도 ‘영화(활동사진)를 만들어보자’는 시도가 나타나는 것은 1919년 쯤.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단성사 극장 사장이던 박승필은 일본인 촬영기사를 고용하여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라는 신파 연쇄극을 제작했다. ‘신파’라면 눈물짜기 싸구려 쇼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개화기 무렵 일본의 가부키(歌舞伎), 분라쿠(文樂), 노(能) 같은 전통 공연(구파)과 달리 새롭게 도입된 신연극(신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판소리, 탈춤 같은 전통 연희와 구분짓는 신연극을 신파라고 불렀다. 신파의 주요 레퍼토리가 눈물을 지극하는 멜로였기 때문에 신파라면 새로운 스타일의 공연이란 인상보다 눈물 쏟는 멜로드라마라는 의미로 더 널리 통한다. 연쇄극(連鎖劇)은 연극 장면 중에 영상을 배경으로 끼워넣은 형식의 연극을 가리킨다.

‘의리적 구토’에는 ‘움직이는 사진’(동영상)을 한두 장면에서 사용하기는 했지만, 무대공연을 위한 배경 장면 정도를 영사했을 뿐이고 스토리를 구성할 만한 장면은 없었다. 배경을 비추고 그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한 것이다. 1963년부터 영화인협회 주관으로 ‘의리적 구토’가 첫 상연된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정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어쨌던 영화장면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그러나 연극에 끼워 넣은 단순 배경 장면을 ‘영화’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뒤따랐다.

최소한 ‘영화’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국경’(1921)이나 ‘월하의 맹세’(1923)같은 영화가 나왔지만 일본인 자본이나 기술이 주도한 경우여서 ‘한국영화’로 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고보면 아직도 ‘한국영화’에 대한 개념 정의도, 시작을 어디에서부터 보아야 할지도 모호하다. 한국영화는 언제 났는지도 모른 채 백수(白壽) 잔치를 하려한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