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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자

고통은 내 몸에 닿아 극대화되지만

그러나 나를 잠시 비워 두고

낮게 낮게 포복해 가면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약해져

저 먼 어느 지맥 속에선가

나의 고통인 듯 그의 고통인 듯

고통인 듯 즐거움인 듯,

들리누나 사방팔방으로

물 흐르는 소리. 졸졸 자알 잘,

아득하게 슬픈 기쁜 이쁜 물소리.

되흘러 들어오누나,

내 혈관 속까지.

- 최승자 ‘즐거운 일기’ / 문학과지성사·1984

 

 

얼마나 많은 경우(境遇)의 고통을 경유(經由)하면, 고통 속에서 이렇듯 느슨한 포즈가 가능할까. “나를 잠시 비워 두고/낮게 낮게 포복”할 수 있는 지극한 긍정이 가능하다니!. 이러한 긍정성은 결여, 상실, 절망을 수 천, 수 만 번 통과하며 체득된 것이리라. 적어도“가느다란 물줄기처럼 약해진” 고통을 듣고 있노라면, 최승자 시인은, 고통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향유하고, 고양된 기쁨을 변용시키라는 니체의 고통관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고통의 깊이만큼 예술의 깊이가 가능한 것일까. 들숨 날숨이 충분히 운명적이다. 운명이라 여기고 돌아서거나 물러서지 않는 태도란?. 주체의 의지가 개입하고 있다는 상상이 가능해진다.존재는 듣고 싶은 것을 좀 더 듣고, 보고 싶은 것을 좀 더 보는 게 아닐까.주체는 청각을 민감하게 열어 놓고 고통에게 ‘역동성’을 부여한다. 그 힘으로 고통은 극점에서 변화하며 새로운 리듬으로 균열한다. “들리누나 사방팔방으로/ 물 흐르는 소리, 졸졸 자알 잘,” 환청처럼 환각처럼 기이한 발랄함이 도출된다. 좀 더 따라가면, 그녀는 경쾌하게 고통을 표현함으로써 경쾌하게 고통을 더 끌고 간다. 누구인가. “되흘러 돌아오누나,/내 혈관까지” 닿는 이여, 누구인가.“아득하게 슬픈 기쁜 이쁜 물소리”로 닿는 이여, 일반적으로 고통은 불일치의 감정일텐데, “몸에 닿는 순간 극대화” 되어 조응의 감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시 ‘맥’에서의 고통은 피하고 싶은 감각이 아니고, 주체가 초대한 ‘무엇’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다./박소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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