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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다산의 남수문

 

수원화성에는 남수문과 북수문이 있는데 형태가 다르다. 왜 다른 모습이 다른지에 대해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남수문의 건립비용은 3만446냥이고 북수문은 3만940냥으로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비용 때문에 다르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시 다산 정약용이 계획할 때는 두 수문의 형태가 같았는데 공사도중 설계변경이 일어나 다른 형태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산 정약용이 남수문을 처음 계획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남수문 공사 이전 자료로 훈련도(訓鍊圖)를 통해 살펴보자. 관련 자료로 성조도(城操圖, 육군박물관 소장)와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 8폭 병풍)가 있다. 성조도는 1795년 윤 2월 을묘원행시기에 군사훈련을 하는데 이를 위해 만든 것이다. 세부를 보면 준공 시설은 검정색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미준공 시설은 홍색(紅色)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남수문은 미준공시설로 7개 홍예와 여장만 있고 포사나 누각은 표현되지 않았다. 분명 남수문은 취약시설로 상부에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인데 여기서는 미준공시설로 간략하게 표현함으로써 부설된 공격 시설이 빠진 것이다.

화성능행도는 그림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당시 건축 건축규모나 형태 및 건축의도의 유추가 가능하다. 그림 중 특히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는 성곽전체가 표현되어 있어 화성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남수문의 초기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서장대야조도는 4개로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호암미술관, 우학문화재단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인쇄본이 아니라 화공이 직접 그렸기 때문에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제작 시기는 2가지로 하나는 공사도중인 을묘년(1795)이고, 또 하나는 1796년 공사가 끝나고 난 후 추가로 제작한 것이다. 호암미술관과 우학문화재단 소장본은 동북공심돈과 동옹성 및 포사가 있는 남수문 등이 표현되어 있어 축성이 완료된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완공 후의 두 민간 소장품은 남수문의 초기형태를 유추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본 논의에서는 제외한다.

남수문이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이다. 이 두 그림은 을묘년(1795년) 행차 이전 모습으로 다산의 설계를 확인할 수 있다. 남수문 모습은 성곽에 있는 포루(鋪樓)나 포루(砲樓)와 같은 형태로 하부에는 물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몇 개의 홍예가 있다. 준공 후의 모습과 다른 점은 일반인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와 포사 위에 지붕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북수문의 초기계획도 누각이 아니고 남수문과 같은 포루 형식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조가 용연과 용두바위를 보고 용두정(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북수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누각형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산이 성곽을 계획할 때 정조의 비밀지시로 일을 진행하였기에 시간과 비용이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 주변 환경까지 반영한 상세한 설계는 쉽지 않았고 당연히 중간에 설계변경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남수문에서 설계가 변경된 부분은 지붕이 없어진 것과 일반인 통로가 생긴 것인데 이에 대해 살펴보자.

지붕이 없어진 것은 옥상에 진입하는 방식이 수직 동선이 아닌 좌우에서 진입하는 수평 동선만 있기 때문이다. 즉, 남수문과 연결된 좌우 성곽의 성곽로와 남수문의 옥상이 연결되어 하부 포사에서 옥상을 직접 올라갈 이유가 없다. 공심돈 같은 경우 수직 동선만 존재하여 내부계단을 통해 옥상을 올라갈 수 있으며 그 상부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옥사에 지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남수문에서 본래 있던 지붕을 제외한 것은 늘어나는 공사비를 줄이는 방안이었을 것이다.

만약 다산의 계획대로 지붕을 설치하였다면 옥상 바닥과 포사를 보호하여 더 튼튼한 남수문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인 통로가 새로 부가된 것은 다산이 여기까지는 염두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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