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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자랑할머니, 사랑할머니

 

 

 

몇 해를 두고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할머니가 계셨다.

유럽의 귀부인처럼 아래 위 한 벌로 된 예쁜 블라우스에 긴 치마를 입으시고 모자를 쓰시고 핸드백을 든 손엔 흰 장갑을 끼고 다니셨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조금도 흐트러지게 하고 한 번도 다니시는 적이 없는 멋쟁이 할머니셨다.

사부작사부작 걸어오셔서 문을 조금 열고 안을 살피신 다음 들어오셔서 늘 같은 자리에 앉으셨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도 새색시 그대로였다. 음식도 조금씩만 드신다고 하시고 여자는 많이 먹고 살찌면 안 된다고 하시는 할머니는 차츰 안면을 트고 말을 섞게 되자 조금씩 자랑을 시작하셨다.

어느 날엔 꽃을 꺾어 오셔서 내 생각이 나셔서 가지고 오셨다고 하시고 어느 땐 가방에서 토마토를 꺼내 놓기도 하셨고 빨갛게 잘 익은 대추도 손에 쥐어 주기도 하셨다.

그렇게 새색시 같은 멋쟁이 할머니가 알고 보니 거의 십년을 혼자 지내시는 독거노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남들에게 추하게 보이고 싶지 않으셔서 자신을 가꾸시며 옷차림에도 늘 신경을 쓰시는 천상여자라고만 생각했다. 연세는 아흔 여섯이셨는데 언제나 소식을 하시고 아침이면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운동을 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변하면 오래 못 산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고 하셨는지 할머니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평소 밝고 화사한 색의 옷을 즐겨 입으시던 할머니께서 얼룩덜룩 어둡고 짙은 색의 바지를 입고 다니셨다. 예의 그 흰 장갑도 벗어버리시고 핸드백도 귀찮으신지 화장품 회사에서 주는 파우치 같은 지갑을 쥐고 다니시다 그것도 버리고 맨손으로 다니셨다.

많이 먹고 뚱뚱해지면 보기 싫다고 소식을 하시던 할머니께서 빵이고 과자고 잔뜩 사셔서 며칠을 두고두고 드신다고 하시며 남은 음식을 싸기 위해 봉지를 얻어가셨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모셔 간다고 몇 번을 와도 내가 편하게 살려고 혼자 사신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다. 그동안 뵙던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너무 많이 변한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미용실에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그 할머니 119에 실려 가셨는데 아무래도 상한 음식을 드신 거 같다고 하신다. 마음에 집히는 게 있었다. 혼자 밥해서 드시는 게 귀찮으신 할머니께서 음식을 며칠을 두고 드시다 결국 일을 내신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참 후 할머니께서 나타나셨고 다시 병원으로 가셨다고 한다. 집 근처 남의 밭에 들어가셨다 들짐승을 막기 위해 둘러친 망에 걸려 넘어지셔서 골절상을 당하셨고 퇴원하면서 바로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렇게 자랑이 늘어지더니 요양원에서도 자랑만 하다 쓸쓸히 눈을 감으셨다는 후문이다.

남들이 자랑할머니라고 해서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불렀지만 얼마나 외롭고 마음이 허했으면 자랑으로 허기를 메우려 애를 쓰셨을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흔이 넘은 노인이 혼자 눈을 뜨고 밥을 먹으며 지내는 일이 얼마나 뼈아픈 절망이었을 지를 가늠해 본다.

절망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치장을 하고 의연하게 살아오신 할머니를 이제라도 자랑할머니가 아닌 사랑할머니라고 불러드리고 싶다.

하늘에서는 꼭 사랑 받으시며 예쁘게 사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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