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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젖지 않고 젖는다는 것

 

 

 

젖지 않고 젖는다는 것

/정영희

작달비는 빈집 처마 밑까지 쫓아왔네

누렁이 한 마리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보고 있네
내린 빗방울이
누렁이 눈 속에 물꽃을 피우네

뛰어드는 발소리에
소리로 맞대응해야 할 지킴이가
이토로 무관심할 수 있다니
누렁이도 때로는
어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하얗게 지워버릴 때가 있다

작달비는 처마 밑에 나를 세워 놓고
장대춤이 한창이네
낙숫물에 빠진 누렁이처럼
빗속에 갇힌 풍경으로 흠뻑 젖어드네


-시집 ‘바다로 가는 유모차’

 

 

 

 

젖지도 않았는데 젖었다니, 무슨 궤변일까? 시인들이란 궤변에 능해야 해서 그 궤변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시를 읽다가 화자만이 아니라 나도 젖어들었으니 제목이 품은 함축성이 시에 생기와 깊이를 불어넣고 있다.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저 누렁이도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비를 피하려 느닷없이 나타난 시인을 알아본 건 아닌지. 어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하얗게 지워버린 그 자리에서 누렁이와 화자는 곡절하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화자는 분명 젖지 않았는데 젖을 수밖에. 무언가에 젖을 때야말로 시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그런 심안心眼이 열려있는 건 아니어서 늘 오감을 열어놓고 예민한 감각과 정신으로 깨어있어야 시는 곁을 내준다. 젖지 않고 젖는 비결이다.

/이정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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