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민족·독립운동 선조들의 발자취가 50세에 리얼리즘 詩로 다시 인도했을까?
항일 민족·독립운동 선조들의 발자취가 50세에 리얼리즘 詩로 다시 인도했을까?
  • 최정용 기자
  • 승인 2019.01.29 19:05
  • 댓글 0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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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용의 여의도TALK
채 광 석 시인/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위원회 위원

27년 만에 두번째 시집 발표 후 호평
“‘리얼리즘 시학 귀환’ 평가에 감사”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
대한민국의 시발점인 임시정부 수립

근현대사 공부하며 부끄러움 느껴
유적지 찾아다니며 과장·왜곡 찾아내

이제 50세 된 나이로 세상에 다시 도전
경기신문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싶어

 

27년 만에 돌아온 시인 채광석(50)의 시는 굵다. 시대의 땀과 역사의 눈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잊혀져가는 ‘혁명’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의식, 역사의 바깥으로 사라져버린 인물군상을 시로 불러낸 까닭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현실에 오롯이 뿌리내리며 개개인의 모든 삶이 역사라고 절규하며, 거대 담론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안타까워 한다. 그 연민의 힘으로 잊혀져가는 모든 것들을 살려내고 있다.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는 27년 침묵으로 씨를 뿌린 거대한 리얼리즘 시학의 귀환이며 난분분한 한국 문단에 울리는 심오한 경종이다. 채 시인은 현재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위원회’ 위원으로 자칫 사라질뻔한 독립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삶을 바치고 있다. ‘최정용의 여의도톡’이 세번째로 그를 주목하는 까닭이다.
 

 

첫 시집 발표 후 27년 만에 다시 시단으로 돌아왔다. 소감은.

20대에도 그랬지만 시단(詩壇)이란 말이 주는 어감이 생경하다. 우리 사회의 격변기였던 80년대와 90년대는 문학이 사회 현실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는 예술론이 강조되던 때였다. 당대의 분위기 탓인지 당시 젊은 문학인들은 전문 예술인의 인증제 같은 시단이나 문단이라는 특정된 공간보다는 사회변화를 갈망하는 현실참여공간이었던 ‘거리’와 ‘광장’을 선호하는 분위기였다.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문학 청년기에 형성됐던 이런 사고체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시단에 돌아왔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다. ‘다시 시를 짓기 시작하다’가 적합하다.



당시 주목받던 ‘청년시인’이 왜 갑자기 절필했나.

주목의 대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분하다. 함께 활동했던 몇몇 선배 시인들과 문학적 스승 몇 분이 예쁘게 보았을 뿐이다. 그 시절엔 젊은 문학가들이 대개 시대적 문제를 자기 문제로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1987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해 내내 학교 안팎에서 터지는 매운 최루탄 속을 위태위태하게 통과하던 때다. 그러다보니 늦은 나이인 1992년에 가서야 군입대를 했다. 입대하면서부터 시 쓰기가 어려워졌다.

1994년 가을에 전역했다. 그 사이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당시 청년 학생들의 정신적 멘토나 다름없었던 김남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님이 이미 작고했다. 그 분들의 부재는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영혼의 큰 공백이 찾아왔다. 적응하기 어려웠다. 80년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함께 통과했던 선배들과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막막함과 무력함이 짓누르던 시절, 아마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또래들의 비슷한 경험이었을게다. 리얼리즘 경향의 문학창작방법론을 고민하였던 또래 친구들이 그 무렵 창작을 멈추고 사라졌다. 팽팽하게 유지해오던 시적 긴장감의 무장해제가 원인이겠다.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무기력증도 한 몫 했을 터다.



다시 시를 짓게 된 동기는.

30년 가까이 소시민으로 살았다. 결혼도 하고, 애도 키우고, 밥벌이도 하고, 잔병치레도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 새 쉰 살. 오십 증후군이 이 찾아왔다. 공허함과 적막감이다. 그 때 누군가의 시나리오처럼 덕수궁 정동극장 앞에서 오랜 선배 문인을 만났다. 여름 비를 함께 맞으며 정동길을 걸었다. 키 작은 자작나무 아래서 그 선배가 하얗게 웃으며 “이제라도 시 쓰며 사세나” 했다. 세상이 하얗게 변한 순간이었다. 오랜 세월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에 대한 열정이 봇물터지듯, 그랬다. ‘이제라도’, ‘(함께)사세나’라는 말이 시 세계로 귀환하지 못하던 머뭇거림에 불을 지폈다, 그랬다.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 ‘함께 타고 넘어온 모든 386들의 초상’이라고 평가했다. 동의하나.

부끄럽다. 방 교수님이 해설을 너무 좋게 썼다.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랜 시절 내가 통과해온 시간과 세상, 사람 이야기를 담담하게 옮겨놓았을 뿐이다. 너무 오랫동안 글을 만지지 않았다. 이런 것도 시가 되나? 그런 의문이 내내 들었다. 그래서 요즈음 시인들의 시를 인터넷에서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언어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21세기에 20세기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를 만났다.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 낡고 투박하게 살아 온 삶과 아직 나처럼 머뭇거리고 있을 영혼들을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고 싶었다.

출간 첫 주 만에 yes 24 신간 시/희곡 분야 1위를 했다. 리얼리즘 시학의 화려한 귀환이라는 평가가 있다. 소감은.

세대와 동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리얼리즘 시에 대한 뜻밖의 관심에 어리둥절하다. 아무래도 동세대 친구들이 관심있게 보아주는 것 같다. 나를 치유하며 다른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전한다. 영광이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원회란.

올해가 3·1운동 100년주년이다. 그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 또한 100년이 되는 해이다. 민주공화제에 뿌리를 둔 오늘날 대한민국의 시작점이자 원형 공간이다.

남녀노소와 모든 계급 계층이 참여했던 것이 3·1 만세 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종래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개념 규정이 혁명적으로 뒤바뀌었다.

새롭게 자각된 이런 시대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실체적 노력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수많은 해외 독립투쟁단체를 탄생시켰다. 26년 동안 멈추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장정을 비롯, 국내·외 의열투쟁, 만주∼연해주∼중국내에서 벌인 무장독립투쟁, 비밀결사투쟁, 아나키스트 투쟁, 각각의 계층들이 각자의 조건과 처지에 맞게 벌인 수많은 항쟁과 저항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고 민주공화제의 정신이 되었다. 100주년 위원회는 이런 역사를 후대에게 선사해준 100년 전 선인(先人)들의 저항과 희생을 기리고 미래 100년 비전을 새롭게 설계하자는 취지에서 출범했다.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자. 4부 ‘역사의 바깥’ 연작시는 100주년 위원회 활동과 연관된 것인가.

한국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반성이 일었다. 일천한 역사 지식이 낯 부끄러웠다. 우리 근대사에 무관심했고 무지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 역사공부로 이끌었다. 사십대 중반부터 4년정도 국내 근대사 유적지를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안목이 생겼다. 과장과 왜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재조명의 당위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간 정설이라 믿었던 역사적 내용이 ‘거짓말’로 판명된 것들도 있었다. 역사기록 속에 숨겨진 우리들 안에서의 ‘어떤 갑(甲)질’들의 민낯도 더러 발견할 수 있었다.

사가들이 현실 사건들을 취사선택해 역사를 구성할 때 흔히들 이런 단서를 단다. ‘모든 일들이 다 역사로 기록될 순 없다. 많은 사건과 사실 들 중 의미 있는 것들만…’이라고. 문득 이런 고민이 들었다. 대체 사가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동시에 누군가에게 특정된 ‘의미 없음’은 결코 역사를 구성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역사 이야기’는 결코 정의롭지 않다. 어떤 특정 기준만을 만족시키는 기록일 뿐이다. 특정한 기준에 의해 배제되고 탈각되어 사라진 역사의 ‘바깥 이야기들’, ‘바깥 인물들’, ‘바깥 순간들’을 문학공간으로 불러내 술 한 잔 올리고 싶었다. ‘역사의 바깥에 존재하는 역사’로 위로하면서. 위원회 활동을 염두하고 진행한 창작 작업은 아니지만 위원회 활동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 여러 문제의식과 대면하게 된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위원회 활동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문학적 활동의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다는 면에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계획은.

선인(先人)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다. 예를 들면 김규식 선생이 1919년 2월1일 전후 상해를 떠나 인도양을 거쳐 42여 일 만인 3월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불혹의 나이를 앞둔 39세 무렵이었다. 파리의 한 프랑스 시인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5개월을 체류하면서 독립청원활동을 했다.

100년 전후 우리 선인들의 공간무대는 5대양 6대주였다. 독립투쟁을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와 함께 지구촌 곳곳에 발자국을 찍어갔다. 그곳에서 선인들이 품었던 절망과 슬픔, 희망과 기대, 노래와 춤 그런 것들을 한 올 한 올 주워보고 싶다. 한국 사회의 불안한 일상에 말뚝 박고 있는 한 중년에게 그런 기회는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전해보고 싶다. 이제 막 50년 생을 통과한 나는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사람처럼 떠들며 거드름을 피우지만 ‘100년 전 쉰 살은, 예순 살은 막 국경을 넘어가는 한창 나이’이기도 했다. 그 길에 경기신문이 함께 한다면 좋겠다.

/최정용기자 wes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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