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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미리 온 봄

 

아침부터 쇼호스트가 봄을 풀기 시작했다. 겨울 한 가운데 서서 하이톤의 목소리로, 꽃무늬, 알록달록한 색깔들로 풀어놓는 봄. 텔레비전 화면 속 홈쇼핑에서 팔고 있는 꽃무늬 봄 재킷이 더없이 화사하다.

“어머나, 벌써 봄?”

“너무 산뜻하지 않아요?”

깔깔거리며 호들갑을 떠는 딸아이를 보다말고 나조차 미리 온 봄에 넘어가고 말았다. 기어이 봄 옷 하나 사고 말았으니 말이다.

내가 느끼는 시골에서의 봄은 늘 그렇게 소리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꽁꽁 얼어붙었던 집 앞 개울에서 ‘쪼르륵 쪼르륵’ 물 흐르는 소리. 사철 후미져 그늘졌던 남새밭 오르는 길이 질척거리며 옹알이 하듯 뱉어내는 소리.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제 새끼들 불러내는 소리. 재재거리며 골목을 오르내리는 어린 아이들의 소리까지.

나지막하게 시작하여 점점 커지는 크레센도, 봄 오는 소리를 거쳐 색깔로 냄새로 묻어나는 봄은 더없이 아기자기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이른 봄은 퀴퀴한 거름 냄새가 신호탄이다. 연이어 돌 틈 구멍구멍에서 솜털처럼 밀어내는 여리디 여린 새순들의 색깔은 그야말로 불가사이의 세계였다.

그것은 어쩌면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리며 올라왔던 것 같다. 어쩌다 양지바른 돌 틈에서 기어이 캐낸 달래 한 뿌리가 뿜어내는 쌉싸름한 내음은 오래도록 코 끝에 머물러 있곤 했다. 보일 듯 말 듯 구분키 어려운 그 각각의 색깔과 냄새는 초를 다투며 짙어지다 온전히 제 색깔, 제 향기 찾을 때쯤 봄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다.

청년기의 봄은 천방지축이다. 노란 꽃이 시작인가 하면 순식간에 왁자하게 번지는 꽃, 풀, 이파리, 병아리, 나비, 갖가지 벌레들까지. 아이들의 표정, 목소리조차 분위기에 들떠 와글거리는 봄은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여름 속으로 잠적하고 만다.

그렇게 봄은 매번 자기 할 일을 꼼꼼하게 다 하고 미련 없이 떠났던 것. 하지만 영락없이 시간 맞춰 찾아올 줄 아는 든든한 봄이었기에 아쉽지 않았었다.

한 낮, 한적한 남향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키 낮은 조릿대의 초록 이파리 뒤로. 그림처럼 심어진 제 몸 틀어쥔 분재 소나무 몇 그루, 빼곡하게 박힌 돌 틈 사이로 이름 모를 겨울 이파리들 재재거리고 있다.

사람이 만든 이 작은 조경 동산에도 봄은 뿌리 내리고 있을 것이다. 깨꽃처럼 한꺼번에 솟아오를 봄이 있다는 걸 안다는 듯 햇살 연거푸 아래로 아래로 흩뿌리고 있다. 봄 불러내는 소리, 손짓처럼 말이다.

요즘 내가 기다리는 봄은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다. 봄조차 나이를 먹는지 새 공책, 새 교과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던 어린 날의 봄과는 달리 해마다 묵직한 다짐이 더해지는 봄이다. 어쩌면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반성할 일이 해마다 늘어났는지도 모른다.

이러다 멀리 아지랑이 꼬물거리는 봄 실루엣에 연 걸리듯 내 다짐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제 곧 성큼 다가설 새로운 봄은 그 다짐 하나씩 실천하는 봄, 연 걸리듯 걸린 그 욕심 하나씩 걷어내는 봄, 그래서 한결 가벼워질 그런 새 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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