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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남수문 복원 上

 

한반도에서 홍예가 가장 많이 설치된 시설은 수원화성의 남수문(南水門)으로 홍예가 무려 9개인데 북수문 보다 2개가 많다. 전쟁을 위한 성곽시설로 보면 참호시설인 포사(鋪舍)가 있는 남수문이 유희시설 건물인 누각의 북수문 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이다.

남수문은 수원화성의 첫 번째 공사로 선정돼 1794년 2월 28일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과 같이 착공한다. 그러나 남수문은 수원천 정비가 선행돼야 하므로 착공과 동시에 중단되고 실질적인 공사는 1년 9개월 뒤에 시작된다. 공사재개는 1795년 11월이고 홍예준공은 다음 해 1월 16일이며 3월 25일에 포사와 여장(女墻) 등이 완성되어 전체 준공이 된다.

남수문도 북수문과 같이 홍수로 두 번의 유실이 있었다. 첫 번째 유실은 1846년으로 이때는 두 수문뿐 아니라 남암문까지 피해를 본 큰 홍수였다. 당시 성곽은 중요 시설이었기에 바로 복구 됐다. 옛 제도에 따라 복원되지만, 하부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앞뒤에만 있던 홍예를 볼트(vault, 전체가 홍예) 형식으로 변경했다. 두 번째 유실은 1922년 일제강점기로 당시에는 조선 문화재의 인지도가 낮았고 화성(華城)은 재래식 무기를 막는 성곽시설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명소로 이름을 떨친 북수문은 바로 복원되지만, 남수문은 외면된 채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갔다.

남수문의 복원은 외면되어왔지만,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자 끊어졌던 성곽을 연결하고자 하는 염원이 복원의 불씨를 지피게 했다. 복원을 위한 발굴이 시행되고 2004년 11월 결과 보고에서 “남수문지 서쪽 도로하부 -1.8m에서 바닥에 깐 박석(薄石, 얇고 넓은 돌)들만 발견되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고 한다. 박석 이외 유구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일제강점기에 하천 양쪽에 도로를 내기 위해 하천 폭을 줄이고 대신 하천을 깊게 팠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천의 유구는 유실됐고 하천이 줄어든 서쪽 편 도로 하부에서만 박석이 나온 것이다.

남수문 복원설계(2010년)에 필자가 참여했는데 3가지의 난제가 기억난다. 첫째는 하천 폭의 문제로 창건 시기에는 북수문에서 남수문까지 하천 폭이 전체적으로 같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하천 정비로 매향교 북쪽은 97척(약 30m) 창건 시기의 폭을 유지하고 있지만, 매향교 남쪽은 시장과 상가들이 천변으로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어 창건 시기보다 22척이 줄어든 75척(약 22m) 됐다.

또 하천 폭을 줄일 때 동쪽은 산이 있어 서쪽 편만 줄였다. 남수문을 복원하면서 당해 문화재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경관으로 줄어든 하천도 포함되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복원될 자리 근처의 땅만 매입하게 되었다. 다리를 놓을 때는 하천 폭이 작은 곳을 택해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반대로 넓은 곳에 다리를 설치하게 된다.

둘째는 하천 깊이가 깊어져 발생하는 문제이다. 원형 크기로 남수문을 설치하려면 낮아진 바닥을 높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곳을 통과하는 물의 양이 적어지게 된다. 만약 홍수가 날 경우 물이 남수문 위로 넘쳐 주변이 침수될 수밖에 없어 물을 우회시킬 조치가 필요했다.

유량을 위해 우회 통로를 설치하는 문제로 복원하는 남수문 바로 앞에 거대한 하부통로를 설치하여 경관을 해치게 됐다. 경관을 위해 우회하는 통로를 남수문과 좀 멀리 설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셋째는 복원 기준의 문제이다. 유실 이전의 남수문의 형태는 두 개로 창건 시기의 형태와 홍수로 유실된 것을 1848년에 복원한 형태가 있었다. 복원은 바로 후자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게 됐는데 이유는 구조적으로 강한 제도로 해야 한다는 일부 전문가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창건기록인 화성성역의궤를 기준으로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남수문 역시 화성성역의궤를 기준으로 복원하는 것이 원형에 가까운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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