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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어느 노파의 일기

 

내 나이 어언 백 서른둘이다. 오늘 아흔두 살인 내 손자가 죽었다. 그가 누구인가. 천금 같은 내 손자. 그는 내 무릎 위에서 재롱을 떨고, 내 등에 업혀서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이제 그는 하늘나라로 갔다. 슬프다. 슬픔이 앞을 가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모진 놈. 무정한 내 손자 놈. 이 할미를 홀로 두고 하늘나라로 간 내 손자가 너무 너무 그립다. 내 품에 안겨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머리에 백발이 와서 앉았다.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온전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몹쓸 당뇨병까지 덮쳤다.

손자는 늘 이 할미 앞에서 병 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약 먹어라 그러면 낫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비싼 약값을 치룰 돈이 없었다. 돈 없는 신세라니. 나도 그를 도울 만큼 부유하지가 않다. 나는 그가 죽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현대의학이 어떠한가? 당뇨병 정도는 병도 아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 먹고 주사 맞으면 백 스무 살까지 능히 살 수 있다.

그러나 내 손자는 현대의술을 거부했다. 그렇게 해서까지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들은 걸핏하면 장기를 바꾼다. 심장도 갈아 끼우고 위장도 인공위장으로 대체한다. 어디 그 뿐인가. 치매가 걸리면 뇌에도 칩을 끼워 젊은이처럼 기억하고 생활하는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내 손자는 그걸 거부했다. 로봇인간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더 이상 가치 없는 삶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끝내 병원 침대 위에서 안락사를 선택했다. 백 서른둘이나 된 이 할미를 버리고, 독하고 모진 내 손자는 북망산천 길을 택했다.

이제 나는 어이 살꼬. 홀로 된 나는 어이 살꼬. 나도 성한 몸이 아니다. 임플란트로 갈아 끼운 내 이빨들도 들뜨고 아프다. 안구를 갈아 끼웠지만 가끔 눈이 시리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내 보청기에서는 끊임없이 이상한 소음들이 들린다. 바람소리 같고, 때로는 매미 소리 같은 소음들이 끊어지지가 않는다.

병원을 찾으면 그들은 다시 내 장기를 바꿀 것을 권할 것이다. 나에겐 돈이 없다. 이제 내가 의지할 데라곤 아무 곳도 없다. 국가가 나를 보호한다지만 매달 칠십만 원 남짓한 기초연금 뿐이다. 그 돈으론 먹고 살기도 힘들다. 인공관절이 고장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갈아 끼운 이빨들도 유효기간이 지났는지 제대로 씹을 수가 없다. 오직 나의 수족이 되어 주었던 손자마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내가 갈 데라곤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 요양원 밖에 없다. 나는 이제 그곳에 갇혀 사육 당하는 짐승처럼 먹이를 얻어먹으며 연명할 것이다. 내가 아프면 그들은 내 장기를 인공장기로 갈아 끼우는 실험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섭고 두렵다.

이 시대는 진시황도 못 이룬 무병장수의 꿈을 이뤘다지만 이것이 과연 보람 있는 인간의 삶인가? 그래서 내 삶이 행복해졌는가? 적막강산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 두고 일흔두 살 내 손자는 저승길로 떠났다.

손자의 죽음이 애달프고도 슬프다. 슬픔을 뛰어 넘어 절벽 같은 상실감과 허무함이 나를 막아서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이놈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 두렵고도 무서운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두고 오늘 저 세상으로 돌아간 내 손자야. 이제 이 할미는 어이 살꼬, 어이 살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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